대순전경 2장 88절~102절 치우천황 장자, 춘추오패 문공중이,心也者鬼身
==대순전경 정정및 주해==
대순전경 2장 88절~102절 치우천황 장자, 춘추오패 문공중이,心也者鬼身
황극대도
2021. 5. 23. 09:18
대순전경 2:88~2:102절
김명칠, 정순검, 김영서, 손병호, 김덕찬 아들
2:88 하루는 신경원이 급히 사람을 보내어 아뢰되
경관의 조사가 심하여 날마다 와서 선생의 주소를 묻나이다
천사 온 사람에게 글을 써주시며 가라사대
이 글을 경원에게 전하여 한번 읽고 곧 불사르라 하시니 그 글은 이러하니라
天用雨露之薄則必有萬方之怨
천용우로지박즉필유만방지원
하늘이 비와 이슬을 박하게 내리면 반드시 만방에서 원이 일고
地用水土之薄則必有萬物之怨
지용수토지박즉필유만물지원
땅이 만물을 기르는데 물과 흙을 박하게 쓰면 반드시 만물이 원성을 내며
人用德化之薄則必有萬事之怨
인용덕화지박즉필유만사지원
사람이 덕화(德化)가 부족하면 반드시 만사에 원망이 따른다.
天用地用人用統在於心
천용지용인용통재어심
하늘이 비와 이슬을 내리고 땅이 물과 흙을 쓰고
사람이 덕화에 힘쓰는 이 모든것이 마음에 달려 있으니
心也者鬼神之樞機也門戶也道路也
심야자귀신지추기야문호야도로야
마음이란 귀신(鬼神)이 드나드는 문호요 오고가는 도로이라.
에서 귀신[神]신을 몸신[身]으로 바꾸어야 한다.
心也者鬼神→ 心也者鬼身
즉 心也者鬼身之樞機也門戶也道路也로 고쳐아 하며
심야자귀신지추기야문호야도로야
마음이란 육(身)이 축이 되어 귀(鬼)가 드나드는 문이요, 도로라
로 해석한다.
開閉樞機出入門戶往來道路神
개폐추기출입문호왕래도로신
그 중추를 여닫고 문호에 드나들고 도로를 왕래하는 신神이
에서 귀신[神]신을 새신[新]으로 바꾸어야 한다.
往來道路神→ 往來道路新
즉 開閉樞機出入門戶往來道路新로 고쳐야 하며
개폐추기출입문호왕래도로신
몸과 마음의 중추를 열고 닫고,
문을 넘나들고 왕래하여 새롭게함에 있어
(새롭게 변화됨에 있어)로 해석한다.
或有善或有惡
혹유선혹유악
혹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나
善者師之惡者改之
선자사지악자개지
선한 것을 스승삼고 악한 것을 고치면
吾心之樞機門戶道路大於天地
오심지추기문호도로대어천지
내 마음을 드나드는 문호와 도로는 천지보다 더 크다 하겠다.
경원이 받아 읽은 뒤에 곧 불살랐더니 그 뒤로 경관의 조사가 그치니라
해석
증산님과 종도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심으로
혹 모반을 꾸미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일본 경관의 조사가 심하여 졌다.
이에 경관의 마음을 풀어 돌리고자 하는 뜻과
일본과 조선 사이에 원한을 풀어 주시고자 함께 처결한 공사이다.
2:89 김병욱의 차인(差人) 김윤근이 와 뵙고 여쭈어 가로대
요사이 날이 가물어서 농작물이 다 마르오니
선생은 단비를 주사 만민의 초조한 마음을 녹이소서
천사 덕찬을 명하사
그 집에 기르는 돗 한마리를 잡아서 종도들로 더 불어 함께 잡수실 새
미처 마치지 못하여 우뢰가 일어나며 비가 크게 내리거늘
윤근이 기뻐하여 가로대 선생은 진실로 만민을 살리는 하느님이시로다 하니라
해석
돗: 돼지
없었던 일이다.
2:90 구릿골 이장 정성원이 여쭈어 가로대
내가 가난하여 살 수가 없사오니 청컨대 가난을 면할 길을 가르처 주옵소서
천사 웃으시며 가라사대
금년에 그대가 받는 마을의 세금을 상납하지 말고 그대가 쓰라
뒷일은 내가 끌러 주리라
성원이 대하여 가로대 너무 심한 말씀이로소이다
국세를 받아쓰고 어찌 생명을 보전하리이까 하고 물러가더니
그 뒤에 고의는 아니나 세금 수천냥을 범포하게 되어
기유년 봄에 이르러 관청에서 독촉이 심한지라
성원이 술이 취하여 마을 고샅으로 돌아다니며 외쳐 가로대
내가 국세를 받아 썼으니 누구든지 내 배를 가르라 하거늘
천사 들으시고 불러서 위로하여 가라사대 염려하지 말라 무사하게 하여주리라 하시니
모든 사람이 다 믿지 아니하였더니
그 뒤에 과연 무기 세금이 면제됨에 성원의 일이 끝나니라
해석
없었던 일이다.
2:91 하루는 공사를 보실 새 양지에 글을 쓰시며 보경을 명하사
동방에 별이 나타났는가 보라 하시니 보경이 나가 보고 들어와
아뢰되 검은 구름이 잔뜩 끼고 별이 보이지 아니 하나이다
천사 문을 열으시고 동천을 향하여 후 하고 한번 부시니
구름이 흩어지고 별이 나타나더라
해석
후천에 서양 사람들이 얼만큼 살수 있는가를 알아보시는 공사인데
서양인들은 많이 살지 않는다는 것을 아셨다.
2:92 태인 백암리 김명칠이 산중 경사지를 개간하여 담배를 심었는데
거름을 하고 북돋았더니 문득 소나기가 오므로
명칠이 가슴을 치며 울어 가로대 내 농사는 담배농사 뿐 인데
거름하고 북돋운 뒤에 이렇게 소나기가 퍼부으니
사태(沙㳲)가 밀어 내려서 다 버리게 되리라 하거늘
천사 들으시고 불쌍히 여겨 가라사대 근심을 풀라
그 재앙을 면케 하여 주리라 하시더니
비 개인 뒤에 명칠이 가보니 조금도 피해가 없고
다른 사람의 담배밭은 모조리 사태의 해를 입어서
이 해에 담배농사가 크게 흉년이 드니라
바른 정정과 해석
김명칠: 전생에는 순민(순박한 백성)이었고
현재는 3생으로 북한으로 태어났으나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
후천에 넘어간다.
북돋다: 심은 작물에 흙을 소복이 하여 눌러둠
거름을 하고 북돋았더니 : 거름을 주고 여식이 굿을 했더니
북돋운 뒤에 이렇게 소나기가 퍼부으니: 굿을 한 뒤에 이렇게 소나기가 퍼부우니
김명칠은 하는 일마다 잘 되지가 않았다.
산중턱을 개간하여 담배를 심고 거름을 준 뒤에
신기가 있던 딸아이가 농사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혼자 굿을 하였는데 그만 그 후 비가내리게 된 것이다.
이것을 증산께서 풀어 주셨던 일이다.
김명칠이 전생에 순민으로 살았기에 도와 주신 것이다.
다른 사람의 담배밭은 모조리 사태의 해를 입어서:
그 해 천지의 운행에 의해 담배 농사가 잘 된 것은 아니지만
모조리 밭을 망치지 않았고 흉년이 들지 않았다.
2:93 하루는 정괴산의 주막을 지나실 때
마침 고부 화란에 면분이 있던 정순검이 이르거늘 천사 술을 사서 접대하시더니
떠날 때에 돈 십원을 요구하며 조끼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돈 십원을 훔쳐가는지라
천사 일러 가라사대 모든 일을 의로써 할 것 이어늘 어찌 이렇게 무레하뇨 하시더라
정순검이 전주에 가서 다시 편지로 사십원을 청구하거늘 형렬을 명하사
돈 약간을 다가 정읍 한 다리에서 도적에게 맞아 죽은지라
천사 들으시고 가라사대 도적을 징치하는 직책을 가진 순검이
도리어 분외의 재물을 즐기니 도적에게 죽음이 당연치 아니하랴
이것이다 신명이 행하는 바니라 하시니라
해석
정순검(정씨순경): 치우천왕의 두 아들 중 직손 첫 아들이었다.
고부화란 당시 증산님을 구타 했던 사람이다.
정읍 한 다리에서 도적을 만나 돈을 빼앗기고 맞아 죽었다.
2:94 하루는 김영서와 정남기가 와 뵈인 뒤에 두 사람이 서로 사담 할 새
남기는 일본 말 배운 사람을 부러워하여 가로대
요사이 일본 말을 아는 사람은 현달되기도 쉽고 돈벌이도 잘하더라 하며
영서는 배우를 부러워하여 가로대 요사이는
연극을 잘 하여도 돈벌이가 잘되더라 하여
서로 그런 일에 등한 하였음을 뉘우치더니
문득 남기는 손을 흔들며 유창한 어조로 일본말을 지껄이고
영서는 상자라 상건을 흔들며 일어서서 상복 소매로 북치는 흉내를 내면서
춤과 노래를 연주하여 등이 젖도록 땀이 흐르니 좌중이 크게 웃는지라
천사 웃으시며 가라사대 너희는 속히도 소원을이루었도다 하시니
두 사람이 비로소 정신을 차려 부끄러워 하는지라
천사 다시 일러 가라사대 대인을 배우는 자
마땅히 마음을 정대히하여 그칠 곳을 알아야 할 것이요
한 가지라도 분수 밖의 생각을 가지며 실없는 말을 함이 불가하니라 하시니라
해석
김영서; 해원인물로 전생에 황제헌원 당시 소국의 제후였다.
정남기: 정씨부인의 친정 오라버니로
전생에는 정씨부인의 친정 아버지였으며 대국의 제후였다.
현달: 승진 출세 길이 열리는 것.
정정
서로 그런 일에 등한 하였음을 뉘우치더니:
그런 일에 등한 한 것을 뉘우친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을 하고 싶어 집안일을 등한히 한 것을 후회하고 뉘우쳤다.
영서는 상(喪)자라: 영서는 상중에 있지 않았다.
상을 당한 사람이 아니라 상(喪)의 기운을 부치셔서 상건을 흔들며 일어서서
상복 소매로 북치는 흉내를 내면서
춤과 노래를 연주하여 등이 젖도록 땀이 흐르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이 일어를 쓰거나 배우가 되기를 심히 바라고
농사를 등한히 한 것을 뉘우침에 증산께서 원을 풀어주신 것이다.
2:95 하루는 손병욱의 집에 가시니 종도들이 많이 모인지라
병욱이 그 아내를 시켜서 점심을 지을 때 날이 심히 더우므로
병욱의 아내가 괴로워하여 홀로 불평하는 말을 하였더니
문득 와사증이 일어나거늘 황응종이 보고 천사께 아뢰인대
가라사대 이는 불평하는 말을 하다가 조왕에게 벌을 받음이니라 하시고
글을 써 주사 병욱의 아내로 하여금 부엌에서 불사르며 사죄하라 하시니
병욱의 아내가 그대로 하여 곧 나으니라
정정과 해석
손병욱: 손병욱이 아니고 손병호와 그의 아내의 일이다.
손병호: 그 당시 1생을 나온 사람이었고 부인에게 잘 대해 주지 않은 사람이었다.
손병호 아내: 전생에 소국의 아내였다.
손병호 아내 역시 남편 손병호에게 불만이 많았고 잘 섬기지 않았다.
조왕신: 조왕신이 아니고 선영신에게 벌을 받아 몸이 돌아가게 되었다.
2:96 대흥리에 계실 때 공우에게 물어 가라사대
네가 남과 싸움을 많이 하였느냐 대하여 가로대 그리하였나이다
다시 일러 가라사대 표단이 들어서 싸움을 즐기나니
이제 표단을 빼어내고 인단을 넣으리라 하시더니
이 뒤로는 공우의 성질이 온순하게 되어 싸움을 즐기지 아니하고
혹 싸우는 자가 있으면 두려운 마음이 생겨서 곧 멀리 피하니라
해석
표단: 험하고 사나운 무신 기질
인단: 화해나 타협의 문신 기질
2:97 팔월 어느날 덕찬이 여쭈어 가로대 오늘 내 매가에 잔치가 있으니
소풍 겸하여 나가사이다 가라사대 내 술을 먼저 마시라
덕찬이 가로대 무슨 술이니이까 가라사대 좀더 기다리라 하시더니
이윽고 공우가 술과 수증계를 가져와서 천사께 올리니라
해석
팔월 어느날: 8월 대보름 한가위 날 이었다.
추석이라 공우가 술을 가져 올 것을 증산께서 미리 아셨다.
그래서 덕찬의 매가에서 술을 받아 드시기 전에
증산님의 술을 먼저 마시라고 덕찬에게 하신 말씀이다.
수증계(찜 닭):
수증계가 아니라 수정과을 가져와 올렸다.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2:98 이 해 겨울 어느 날 아침에 대흥리를 떠나 태인 새올 최창조의 집으로 가실 때
공우는 해가 오르면 길이 질까하여
진 신발을 하였더니 천사 보시고 진 신발을 하였느냐 하시며
손으로 동쪽 재에 떠오르는 해를 향하여 세 번 누르시니
해가 오르지 못하다가 살포정 주막에 들어 쉬시니
그제야 해가 문득 높이 솟아오르더라
해석
이 해 겨울 어느 날: 겨울 어느 날이 아니라 더운 한여름 날 이었다.
진 신발: 나무로 만든 목신이다.
여름날이라 며칠 계속 비가 와서 발이 젖지 않기 위해 목 신발을 신었다.
해가 오르지 못하다가: 해를 멈추는 것은 천지의 운행을 멈추는 일로
어느 누구도 그리하여서는 않되고 그럴 수도 없는 일이다.
2:99 최창조의 집에 이르사 벽력표를 묻으시니
곧 우뢰가 크게 일어나며 천지가 진동하는지라
곧 거두시고 이튿날 구릿골 약방으로 가시니라
해석
없는 일이다.
2:100 창조의 집에서 공우에게 물어 가라사대
네가 눈을 많이 흘겨 보느냐 대하여 가로대 그리하나이다 다시 일러 가라사대
집으로 돌아가라 하시거늘 공우 집으로 돌아 올 때
길에서부터 눈이 가렵고 붓더니 집에 이름에 안질이 크게 나서
달포를 앓다가 하루는 밤을 쉬고 일어나니 씻은 듯이 나았는지라
천사께 와 뵈이니 가라사대 안질로 고생하였느냐 하시고 웃으시더라
원래 공우는 성질이 사나워서 싸움을 즐기고 눈짓이 곱지 못하더니
이로부터 성질이 부드러워지고 눈짓이 고와지니라
해석
이 일은 96절에서 공우에게 해 주신일
(이제 표단을 빼어내고 인단을 넣으리라)이 있기 전에 있었던 일이다.
공우가 사람을 대할 때 눈을 많이 흘겨보는데 창조의 집에서도 그렇게 하기에
증산께서 공우에게 집에 돌아가라고 하셨다.
공우가 집으로 돌아가는데 곱게 가지 않고 성질을 부리며 가다가
고부인님이 앓으시는 안질을 받게 되었다.
달포를 앓다: 45일이 아니라 정확히 48일을 앓다가 49일 째 나았다.
안질 증상: 48일 동안 눈에 핏발이 심하게 서고 눈이 무척 가려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2:101 공우 술이 과하여 주실이 많더니
하루는 천사 가라사대 네가 술을 즐기니 주량을 보리라 하시고 술을 많이 주시거늘
공우 연하여 받아 마시고 취한지라 다시 가라사대 한잔 술 밖에 못 된다 하시더니
이 뒤로는 한 두 잔만 마셔도 곧 취하여 견디지 못하니라
해석
이 일도 96절의 (이제 표단을 빼어내고 인단을 넣으리라) 하는 일이 있기 전의 일이다.
주실: 공우가 관운장 이었다가 2생에서는 배움도 없이 살아온 터라
술을 마시면 행패를 부리거나 무례하게 굴었다.
또한 술에 취하면 남의 집 닭을 가져다가
냇가에 가서 닭을 서리해서 구워 먹기도 하였다.
이렇게 주실이 심했기 때문에 박공우와 공사를 보시기위해서는
박공우의 행실을 바로 잡으셔야 했으므로 술이 약해지는 공사를 보시게 되었다.
2:102 덕찬이 아들 혼인을 지내려 할 때
여러 사람들이 물품과 돈으로 부조하거늘 천사 가라사대 나는 부조할 것이 없으니
일기로나 부조하리라 하시더니 이때에 일기가 연일 험악하여 심히 염려하던 중인데
그날에 이르러서는 뜻밖에 온화하여지니라
해석
김덕찬 아들: 전생이 춘추 5패의 하나였던 문공중이(文公重耳)였다.
문공중이(文公重耳)-
진나라의 22대 군주로 B.C.636~628년 재위.
진헌공(晉獻公)의 서자(庶子)로 견융(犬戎) 공녀의 소생이며 본명은 중이(重耳).
부친의 애첩인 여희(驪姬)의 흉계로 나라에서 쫓겨난 뒤
호언(狐偃)·호모(狐毛)·조쇠(趙衰)·위주(魏犨)·
호사고(狐射姑)·전힐(顚頡)·개자추(介子推)·선진(先軫)·호숙(壺叔) 등
충신들의 보좌를 받으면서 천하를 주유(周遊)했음.
주유 과정에서 세상사에 대한 풍부한 견문과 처세의 경험을 쌓았으며
인간사를 다루는 폭 넓은 지혜와 경륜을 체득했음.
진목공(秦穆公)의 원조를 받아 실정만을 거듭했던
이복 동생 혜공(惠公, B.C.650~638년 재위)의 아들이자
역시 암군(暗君)인 회공(懷公, B.C.637 재위)을 몰아내고
진나라의 군위에 오른 후 공명정대한 정치로 내정을 안정시키고
군사, 경제력을 부흥시켰음.
내치 안정을 토대로 성복(城濮) 전투(B.C.632)에서 남방 초나라의 대군을 격파해
중원의 평화를 수호하고 천토(踐土)에서 중원 제후들을 소집하여
그들을 위복(威服)시킴으로써 춘추 시대의 두번째 패업(覇業)을 이룩했음.
[네이버 지식백과] 진문공 [晉文公]
김덕찬의 아들 2생 당시 혼인을 할 시기에
일기가 연일 험악하여 심히 염려하였으나 전생이 훌륭한 춘추5패의 제후중
한 명인 문공중이(文公重耳) 였기 때문에 증산님께서 날씨 부조를 하여 주셨다.
진문공(文公重耳)의 신하 개자추와 한식의 유례
개자추
1. 19년간 진문공을 수행하다
춘추시대 진나라 사람으로 개지추라고도 불린다.
진 문공이 공자(公子)였을 때 국내 정변을 피해 외국으로 망명했는데,
개자추가 19년 동안 문공을 수행했다.
산시(山西)성 지에시우(介休) 현의 면산(綿山)에는 그의 무덤을 비롯하여
개자추와 관련된 유적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특히 면산에는 개자추에 얽힌 전설과 유적이 많다.
개자추 전설 중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전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춘추시대 진나라의 내정은 아주 복잡하고 어지러웠다.
헌공이 여희(?~기원전 677)의 꾐에 빠져 태자 신생을 죽였고,
그 위기상황이 작은 아들 중이(훗날의 진문공)에게도 미칠 판이었다.
이에 중이는 가신들을 거느리고 국외로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개자추는 중이를 수행하며 충심을 다해 모셨다.
중이가 배가 고파 먹을 것이 없을 때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고깃국을 끓여 줄 정도였다.
여기서 ‘허벅지 살을 베어 주군을 받들다’는 뜻의
‘할고봉군(割股奉君)’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2. 개자추의 회한과 진문공의 후회
19년의 망명 생활 끝에 진나라 사람들과
진(秦, 중국 최초 통일국가)의 도움을 받아 중이는 권력을 잡을 수 있었는데,
군주로 즉위한 중이는 춘추오패1)의 한 사람인 진문공이다.
그는 먼저 자신의 망명생활을 수행하며 도운 신하들을 모두 관직에 봉했다.
그런데 개자추에게만 공로도 녹봉도 돌아가지 않았다.
이에 개자추는 집으로 돌아와 홀어머니에게
“문공께서 돌아와 군주의 자리를 이은 것은 하늘의 안배입니다.
그런데 몇몇 인사들이 그것을 자신의 공로라고 떠벌리고 있으니
어찌 공로와 상을 탐내고 군주를 속이는 짓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정말이지 그런 자들과 함께 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숨어 살기로 결심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네가 정말 그렇게 마음 먹었다면 나도 함께 가마.”라고 아들을 격려했다.
그리하여 개자추는 벼슬을 마다하고 어머니와 함께 산속으로 숨어버렸다.
이때 개자추의 처지를 동정하는 사람들이 궁궐 곳곳에 무기명으로
“용이 하늘로 나니 다섯 마리 이무기가 보좌하는구나.
용이 이미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네 마리 이무기가 각자 그 자리를 차지하는구나.
오직 한 마리가 원망하니
그 간 곳을 아무도 모르는구나.”라는 글을 붙였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문공은 “그건 바로 개자추를 말하는 것이다.
내가 군왕이 되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된 것이 정말 개자추 때문인데
그를 비굴하게 만들었구나.”라며 급히 사람을 보내 개자추의 행방을 찾게 했다.
마침내 개자추가 면산에 어머니와 함께 숨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문공이 몸소 면산으로 가서 사람들과 함께
개자추를 힘껏 불렀으나 산이 워낙 깊은지라 돌아오는 것은 메아리뿐이었다.
이에 문공이 누군가의 건의를 받아들여 면산에 불을 질렀다.
효자로 이름난 개자추가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밖으로 나올 것이라는 권유 때문이었다.
불은 3일 밤낮으로 탔지만 개자추 모자의 행방은 찾을 수 없었다.
불이 온 산을 다 태우고 꺼진 뒤 비로소 모자가 끌어안은 채
나무 밑에서 새까맣게 타죽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문공은 땅을 치며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문공은 개자추 모자를 기념하기 위해
면산 주위의 땅을 개자추의 땅으로 봉하고
면산을 개산으로 고쳐 부르게 하는 한편,
그 일대 지역을 ‘개자추가 쉬었다’는 뜻의 ‘지에시우(介休) 현’으로 불렀다.
또 매년 면산에 불을 지른 날(청명절 하루 전날)을
한식(寒食)날로 정해 더운 음식을 먹지 못하게 했다.
문공은 불에 탄 면산의 나무로 나막신을 만들어 신었다고 한다.
걸을 때마다 발밑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개자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귀한 친구를 부를 때 ‘족하(足下)’라 했다고 하며,
흔히 일본의 고유한 신발로 알려진 ‘게다(下駄)’도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
산시성 지에시우 현의 면산에는 개자추의 사당과 무덤 등
개자추 관련 유적들이 매년 복원, 개발되고 있으며,
1년에 130만 명의 중국인이 다녀가는 관광지가 되었고,
국제적으로 유명한 명소가 되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4. 후대 기념 작품
역대로 많은 시인 묵객들이 개자추의 정절을 기리는 문장을 남겼는데
당나라 때 시 두 구절을 소개해둔다.
부생과하모 浮生果何慕,덧없는 인생에서 과연 무엇을 그리워하나?
노거선개추 老去羨介推.늙어감에 개자추를 선망하나니.
- 고황의 <의고삼수(擬古三首)> 중에서 -
개자종지녹불급 介子終知祿不及,
개자추는 끝내 작록(작위와 녹봉)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알았고,
왕손수긍일상련 王孫誰肯一相憐. 왕손(진문공)은 누구를 이토록 가엾어 하는가?
[네이버 지식백과] 개자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