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순전경 3장 23절~24절 천고춘추아방궁 만방일월동작대
==대순전경 정정및 주해==
대순전경 3장 23절~24절 천고춘추아방궁 만방일월동작대
황극대도
2021. 5. 24. 12:08
3:23~3:24 차치구
3: 23 이튿날 솔안을 떠나 정읍 대흥리로 가실때
공우를 돌아보시며 가라사대 「만났을 적에」하시니
공우가 문득 동학가사에
「만나기만 만나보면 너의 집안 운수로다」라는
구절이 깨달아져 드디어 따라 나서니라
해석
맞는 내용이다.
3:24 이날 대흥리 경석의 집에 이르사 가라사대
나의 이르는 곳을 천지에 알려야 하리라 하시고
글을 써서 서쪽 벽에 붙이시니
문득 우뢰가 크게 일어나거늘 천사 속하다 하시고
그 글을 떼어 무릎 밑에 넣으시니 우뢰가 곧 그치는지라
공우는 크게 놀래어 감복하고
마을 사람들은 뜻밖에 일어나는 백일뇌성을 이상히 여기니라
우뢰를 거두시고 경석에게 물어 가라사대 이 집에서
지난 갑오년 겨울에 세 사람이 동맹한 일이 있었느냐
대하여 가로대 그러하였나이다
가라사대 그 일로 인하여 모해자의 밀고로 너의 부친이 해를 입었느냐
경석이 울며 가로대 그러하였나이다
또 가라사대 너의 형제들이 그 모해자에게 큰 원한을 품어 복수하기를 도모하느냐
대하여 가로대 자식의 도리에 어찌 복수할 마음을 갖지 아니 하오리까
가라사대 너희들이 복수할 마음을 품고 있음을 너의 부친이 크게 걱정하여
이제 나에게 고하니 너희들은 마음을 돌리라 이제는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할 때라
만일 악을 악으로 갚으면 되풀이 되풀이로 후천에 악의 씨를 뿌리는 것이 되나니
너희들이 나를 따르려면 그 마음을 먼저 버려야 할지니 잘 생각하라
경석이 이에 세 아우로 더불어 별실에 들어가서 서로 위로하여 그 원한을 풀기로 하고
그대로 아뢰니 가라사대 그러면 뜰밑에 짚을 펴고 청수 한동이를 길어 놓고
그 청수를 향하여 너의 부친을 대한 듯이 마음 돌렸음을 고백하라
경석이 그대로 하여 사형제가 설움에 복받쳐서 수동이 앞에서 크게 우니
천사 일러 가라사대
너의 부친이 너무 슬픈 울음을 오히려 불쾌히 여기니 그만 그치라 하시니라
그 뒤에 「천고춘추아방궁千古春秋阿房宮 만방일월동작대萬方日月銅雀臺」 를
써서 벽에 붙이사 경석으로 하여금 복응케 하시니라
해석
글을 써서 서쪽 벽에 붙이시니:
차치구와 그 자식들 간의 원한이 너무 커서 그 일에 막혀 일을 할 수 없음으로
그것을 제거키 위해 하신 일이다.
세 사람이 동맹한 일: 세 사람을 차치구외 2명이다.
2명: 진시황(차경석 전생) 때 만리장성을 쌓으러 갔다가
진시황에 의해 죽게 된 인물들인데
2명 중 한 명이 밀고를 하면서 차치구가 죽게 되었다.
동맹한 일: 차치구를 포함한 세 사람은
동학혁명에 가담한 일이 성공하면 재산을 빼앗고 벼슬에도 앉자고 동맹을 하였었다.
너의 부친이 너무 슬픈 울음을 오히려 불쾌히 여기니 그만 그치라:
부친이(차치구) 불쾌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만리장성을 쌓을 때
죽은 두 명의 원한 맺힌 선영신들이 불쾌히 여기니 울음을 그치라 하셨다.
천고춘추아방궁千古春秋阿房宮
만방일월동작대 萬方日月銅雀臺」 를 써서 벽에 붙이사
경석으로 하여금 복응(服膺)케 하시니라
해석
이 글귀를 써서 벽에 붙이고
차경석에게 복응케 하신 것은 보천교에 해원을 부치시기 위한 것이다.
진시황은 아방궁에서 천고춘추(千古春秋)를 누리고자 했고
조조는 동작대를 지어 만방에 그 세력을 일월처럼 떨치고자하였으나
이 모든 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원들을 해원시키고자
보천교라는 거대한 판을 차리게 하는 공사를 보시게 되는데
이 해원에는 또 하나의 큰 비의가 있다.
그것은 분서갱유 때 생매장 당한 수 백 명의 사람들과
시황이 죽어 무덤에 들어갈 당시 진시황과 함께 생매장된
1만 8천명의 (여자: 7천 명과 남자: 1만 1천명)
처녀 총각들의 크나큰 원한을 해원 시키는 일이었다.
이 1만 8천명은 구한말에 모두 조선 땅에 태어나 있었다.
이 사람들과 차경석이 모두 차경석을 우두머리로 하여
보천교라는 판에서 각기 해원을 할 수 있는 공사를 보셨다.
*증산님께서는 이 공사를 보실 때 너무나 큰 기운을 쏟아 부으셨다.
조선 땅에 태어나 있는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보천교라는 판에 들어와 일일이 원을 풀도록 판을 짜신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셨을 것이다.
이 일을 손쓰지 않게 되면 해원공사를 해결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심혈을 기울이셨고 이 공사와 또 하나의 공사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으셨기 때문에
증산님의 명이 12년을 단축하게 되었다고 한다.
보천교 해원 공사로 인해 9년이
또 하나의 공사로 인해 3년의 수명이 줄어들게 되었는데
또 하나의 공사는 드러낼 수가 없는 일이다.
아방궁의 시초
아방궁은 은나라 주왕의 여인 달기로부터 만들어진 터에 진시황이 아방궁을 짓게 된 것이다.
탕왕으로부터 28대 째로 은나라 마지막 군주가 된 주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달기는
주왕이 정벌한 오랑캐의 유소씨국에서
공물로 보내온 희대의 독부 였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으나
달기는 오랑캐 유소국의 사람이어서 은나라에 복수를 한 것이 아니다.
달기는 은나라 시조 탕왕 때 배척을 받아
궁에서 쫓겨난 성수청 사람들의 후손으로 태어난 성수청의 자손이었다.
성수청이란 각 궁에 있는 샤머니즘의 일을 담당하는 기관 같은 곳이다.
이 기관은 중국에도 있었는데 은나라를 창건한 탕임금은 샤머니즘을 믿지 않았다.
때문에 이 성수청 사람들은 탕에게 배척받아 궁에서 쫓겨나 지위는 땅에 떨어지고
삶은 궁핍하며 천대 받는 무리가 되어 전전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성수청 사람들 입장에서는 은나라가 이어지는 동안 그들의 능력이 배척 당하고
비천한 삶을 살게 되자 그 원한은 커 질 수밖에 없었고
자신들의 손으로 은나라를 부셔버리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던 중 그 샤머니즘 족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달기라는 여인이 태어났다.
달기의 미모는 은나라 28대 주왕의 마음을 사로잡아
은나라를 향한 복수의 서막이 열리게 된다.
달기는 주왕을 부추겨 궁을 짓기 시작한다.
그 궁의 터는 총 여덟 군데나 되었다.
달기는 여덟 군데나 궁을 지어 은나라의 삶을 피폐시키려 했고
그 여덟 곳의 터를 일일이 달기가 정하였다.
달기는 성수청 사람들이 후손으로 천문지리에 통하였고
그 능력을 이용해 불운이 있는 터만을 골랐다고 한다.
주왕이 궁의 터들을 닦을 동안
노역자들은 나무로 만든 도르레를 이용해 무거운 것들을 옮겼는데
도르레가 나무로 만들어졌다보니 부러지기 쉬웠고
그 부서진 나무들로 인해 일꾼들은 큰 부상을 입어 불구가 되는 일이 많았다.
그 때 쓰인 나무 도르레가 인류 최초의 도르레이다.
그러나 주왕은 그 터전을 닦을 때 부린 일꾼들의 세경을 전혀 주지 않았고 그 원성은 높았다.
또한 만방일월동작대萬方日月銅雀臺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동작대의 터를 다진 사람 역시 주왕이기 때문이다.
‘천고춘추아방궁千古春秋阿房宮 만방일월동작대萬方日月銅雀臺」를 써서
벽에 붙이사 경석으로 하여금 복응케 하시니라’에서
해원공사에 조조의 동작대를 함께 부치신 이유는
동작대의 터를 닦으며 주왕이 노역시킨 노역자들의 한과
조조의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해원을 포함시키셨기 때문이다.
은나라의 주왕이 죽을 때 백성들이 모도 나와 환호를 외쳤다 하니
그 당시 백성들이 주왕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얼마나 컸을지 알고도 남는다.
진시황이 궁을 지을 때 달기가 정한 여덟 곳 중에 하나인
중국 위수의 남쪽 상림원에 아방궁을 지었다.
진시황이 아방에 궁을 지으려 하자 상림원 호수가 두 번이나 핏빛으로 물들었고
쥐 떼들이 새까맣게 그 주위를 돌았는데
시황제의 아버지인 여불위가 이것은 좋은 징조이니
반드시 이곳에 궁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은나라가 폐하면서부터
달기가 잡은 궁 터 주변들에 쥐 떼들이 가끔씩 출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불위 [呂不韋]
조(趙) 나라 출신의 대상인.
세상의 흥망성쇠를 읽는 눈과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판단력이 매우 비상했음.
일찍이 조나라에
볼모로 와 있던 진(秦) 나라의 왕손 이인(異人, 일명 자초(子楚))을
우연히 보고 나서 그가 기화(奇貨, 기묘한 보배)임을 첫눈에 간파하여
이후 물심양면으로 후원한 끝에,
마침내 그를 장양왕(莊襄王, B.C.249~247 재위)으로 즉위하도록 만들었음.
장양왕이 즉위함과 동시에 승상(丞相)이 되고
문신후(文信侯)로 봉(封)해져 낙양(洛陽) 부근의 식읍(食邑)
10만 호를 받음으로써, 진(秦)나라는 물론 천하 제일의 부귀와 권세를 누리게 됨.
이후 자신의 권세를 믿고 한없이 방자해져 자신이 이전에 장양왕에게 헌납해
왕후로 삼게 했던 옛 애첩
(진시황의 어머니. 진시황은 장양왕의 아들이 아니라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음)과
불륜 행각을 벌이는 한편, 군사권과 인사권을 농단하여
한때 진나라를 영씨(嬴氏)가 아닌 여씨(呂氏)의 나라로 만든다는 비난까지 들었음.
[네이버 지식백과]
아방궁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자
위수의 남쪽에 있는 상림원 가운데에 궁궐을 축조하기 시작한것이 아방궁이다,
먼저 아방에 전전을 건축했는데 동서의 넒이가 500보 이며 남북의 길이가 50장으로
그 안에는 만명의 사람을 수용할 수 있었고
아래에는 5장 높이의 깃발을 꽂을 수 있었다,
사방으로 구름다리를 만들어 궁궐에서부터 남산으로 직접 올라 도달 할 수 있게 하였다,
남산의 꼭대기에 궐을 세워 표식으로 삼았다,
또 복도를 만들어 아방의 전전에서 위수를 건너 함양의 궁궐까지 연결 시켰다,
북두칠성 중의 한별인 각도성이 은하수를 가로 질러
영실성에 이르는 모습을 상장하게 하였다,
아방궁이 완성되지 않았으나 완성된 후에는 다시 좋은 이름을 골라 명명 하려고 하였다,
아방에다 짓는 궁궐이라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아방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후에 진나라를 멸망시킨 초패왕 항우가 불태워 버렸다,
아방궁규모는 동서의 길이가 700미터 이고 남북의 넓이는 115미터가 되었다,
네이버-
진시황의 아방궁의 시초는 이렇게 은나라의 달기로부터 시작되었고
주왕으로 발생된 사람들의 한이 아방궁이나
동작대의 터에서 연유해 진시황이나 조조에게까지 이어져 얽혀 있던 일이라
증산님께서 이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
해원 공사를 보시는 일이 얼마나 힘이 드셨으면
이생의 명이 9년이나 줄어들었을까를 생각하니
안타깝고 감사한 마음 깊이 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