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편] 아홉 개의 경전(전무지후무지법) - 본론 - 탁옥경(琢玉經) - (가)
2017. 7. 16. 6:14
◈ 탁옥경(琢玉經) – (가)
탁옥경은 문답 형식으로 쓰여진 경(經)으로서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에 관하여 미륵 상제님께서 설명하시는 내용의 글이
서두(書頭)로 시작하여 옛 선조들에 대한 前世, 現世, 來世에 대한
윤회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반고(盤古), 요(堯), 순(舜), 이태조, 김부식, 정몽주, 신숙주, 정인지, 윤관,
을지문덕, 이승만, 김구 등에 관한 윤회 내용이 있으며
또한 비행접시인 원반물체에 대한 언급도 있는데
天人의 조화로 공중 승차하여 간간히 아미타성을 살피고 간다고 하며
경술(庚戌)년 이후에 지상천국과 더불어
착지(着地) 견학하게 된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는 經典이다.
감문(敢問) :
우리 국조(國祖) 단군(檀君) 일 천년 史가 전함이 없음에
사학가들의 억측이 구구할 뿐만 아니라
자손된 우리 민족으로서 어찌 조선(祖先)을 망각하오리까,
상세 교시(敎示) 복원(伏願)하나이다.
尊佛님 답왈(答曰) :
백의 민족의 시조 단검은 태백산(太白山: 백두산) 동편
강선대(降仙臺)에서 출생하였나니
그 부왕 환웅이 도솔천에 있을 때에 이미 降世한
천연(天緣)의 웅녀(熊女)를 만나기 위하여
父王 환인 천제께 인간에 하강하기를 지성간청(至誠懇請)함으로
환인 천제께서 아드님 환웅을 데리고 이 땅에 내려오사
태백산(太伯山: 묘향산)에 내려와 있는 熊女를 만나 天
緣을 끊고 인연(人緣)을 맺게 하여 수태(受胎) 生男할 새,
환인 천제께서 도솔천에 있는 환웅의 아들을 인간에 내치어
또다시 인간의 아들로 태어나게 하시니 이가 곧 환검(桓儉)이시니라.
환웅천제 강세 후 1,281 년간 기자(箕子) 등국(登國)까지
27대 간의 사적(史蹟)을 남기었나니
백의 종족의 始가 自 단군으로 위시하였느니라.
후에 중원의 난을 누차 당하여 그 사적이 연멸(煙滅)하였음에
후세 자손들이 일천여 년간의 시조 사적을 부지기과(不知己過) 하였느니라.
이제 그대들이 비로서 혈통을 찾으니 기특하도다.
인간은 각기 근본기서(根本基緖)가 있나니
先天의 선지식(善知識)들이 한 사람도 이 점에 유의치 못하고
항상 남의 조상을 위천재천(爲天載天)하였으니 어찌 탄식할 일이 아니리요.
이제 시조 단군 이후
일 천 수백 년간의 대사적을 천명하여 후천 오 만년간 빛나도록 하리라.
시조 단군(檀君)께서 三子를 두었으니
長子는 부루(扶婁)요, 次子는 부소(扶昭)요, 三子는 부항(扶項)이라,
시도(始都)를 아사달(阿斯達: 함경북도 경성)에 두었다가
扶婁가 王位 함에 삭시(朔試: 安州)로 定都하였다가
재차 평강성(平康城: 平壤 西 40리) 으로 옮겼나니
이로부터 국기(國基)가 정상으로 서게 되었느니라.
次子 扶昭는 소정시(蘇井市)를 자리잡아 왕위에 오르니
즉 지금의 吉州라, 扶昭가 왕위 함은 시조 281년 후이고
전 국민의 자손은 불과 140餘人이었으며,
扶婁王의 국민은 720餘人으로서 국체(國體)를 형성하였느니라.
그러므로 환인 천제께서 아드님 환웅 천왕으로 더불어
홍익정신(弘益精神)을 가지셨느니 번영 성자손(盛子孫)을 목적하심이니라.
檀君께서 개천(開天)하실새 당년 上元甲子 10월 3일이니 거금 4,300년 전이니라,
二代 扶婁王은 시조 223년에 王位 하니
그 배비(配妣)는 하국(夏國) 재상 마윤(溤潤)의 女니, 生 12男 二女 하였나니,
長子 장(壯), 高性, 俵佑, 杜率, 稀居, 干奇, 義經, 批摩, 干廉, 守敍, 美帝, 求辟 등이니,
四子 杜率이 만장구(萬丈溝: 遼河) 等地로 이주하여 일국을 이루니
是가 북랑국(北浪國)이요, 七子 義經이 두구(豆溝)에서 개국하니
시(是)가 만제국(滿齊國)이니 즉 목단강(牧丹江) 유역이니라.
初代 단군(檀君)께서 223년 재위하시다가 長子 부루에게 전위하시고
今 白頭山 강선대(降仙臺)에 유(留)하시다가 上天하시니라.
부루 왕은 재위 107년에 三代 莊王에게 전위하였나니
직계는 평강(平康)에서 도읍으로 눌러 있으며
부소 왕은 소정시(蘇井市)에서 부루 왕과 병립하였다가
재위 69년 만에 兄인 부루 왕과 합치고 폐국(閉國)하였나니
수(壽)는 168년이니라.
三代 莊王도 하국녀(夏國女)로 위비(爲妣)하여
生 4男 6女 하니 奇須, 奇良, 須頓, 候周였나니
三子 須頓이 요하(遼河) 西北 今 몽고 등지로 이주하였고
二子 奇良이 왕위에 오르니 是 단군1,200餘年間 가장 큰 사업이 이루어짐이니라.
莊王은 재위(在位)가 123년이요, 수(壽)는 306년이니라.
四代 奇良王이 집정함에 민족의 분포를 도모(圖謀)하여
이 분포에 소방주국(小邦州國)을 봉(封)하였으니 凢八州六邦으로 하였느니라.
이 분포에 앞서 凢 6년간 천하를 주유하여
지세를 살피어서 14邦 州 國域을 정하였느니라.
평강(平康)에서 출발하여 初見回州(九月山下), 次見南昌(南漢城),
次見滿須山(부여), 次見渭州(전주), 次見明山(광양), 矗城(진주),
次見東關(경주), 次見陽州(상주), 次見茂州(춘천), 次見尾刹(朱乙),
次見阿古邱(만주 禹家屯), 次見黑山(만주 長春),
次見衛州(만주 營口), 次見西鎭(遼河 北河溝)하니라.
이에 奇良王이 큰 뜻을 품고 無山千里 대 평야를 자리잡아 平康을 떠나
아고구(阿古丘) 우가둔(禹家屯)에 천도하니
그 강역이 西는 黃海에 임하여 今 산동(山東) 이북으로 경(經)하야
北京의 칠 백리 북방 기양봉(奇良峯: 왕이 初留하여 奇良이라 칭함)을 연하여
몽고에 이르고 내외 몽고를 전부 하여 전 만주일대를 점함에
14개 邦州 형제국을 세워 상호 大小家로서 상통하여
종국(宗國)을 기양왕(奇良王)으로 봉하니 이를 일컬어 조선국(朝鮮國)이고
그 외 叔 두솔(杜率)은 이미 북랑국(北浪國)을 이루었음에
두솔왕의 아들인 반(潘)으로 西鎭邦에 封王하고,
叔 의경(義經)은 衛州邦에 봉왕(封王)하고, 叔 수서(守敍)는 尾刹邦에 封王하고,
叔 희거(稀居)는 黑山邦에 封王 하고, 叔 간염(干廉)은 茂州邦에 封王 하고,
叔 고성(高性)은 九月邦에 封王 하고, 叔 미제(美帝)는 南昌邦에 封王 하고,
叔 구피(求辟)는 明山邦에 封王 하고, 叔 비마(批摩)는 滿須邦에 封王 하고,
叔 간기(干奇)는 渭州邦에 封王 하고, 叔 표우(俵佑)는 矗城邦(촉성방)에 封王 하고,
伯兄 기수(奇須)는 東關邦에 封王 하고, 弟 후주(候周)는 陽州邦에 封王 하고,
從祖 扶項之子인 근(覲)은 平康邦에 봉왕(封王)하였느니라.
그 지역을 정하되 西鎭邦을 광(廣) 4,300餘里, 長 6,000餘里로 하였으며
西南은 中原을 격하여 있게 하고 그 외는 지역경계를 가리지 않고
14州邦 國間 一家制度로 상통 화목하였느니라.
王弟 수돈(須頓)은 이주 몽고(蒙古)하여 그 후 내왕이 두절되었으나
그 실 몽고족 거개가 환인천제의 후손들이니라.
須頓이 입주 蒙古 하여 生 6男 6女 하고, 孫이 31人으로 그 자손이 번성하였느니라.
四代 奇良王이 14州邦으로 분포한 후에 그 자손이 번성하였나니,
기양왕(奇良王)이 18 왕자이고, 西鎭王이 6 왕자이고, 衛州王이 8 왕자이고,
尾刹王이 14 왕자이고, 黑山王이 4 왕자이고, 茂州王이 15 왕자이고,
九月王이 11 왕자 이고, 明山王이 16 왕자이고, 滿須王이 19 왕자이고,
渭州王이 11 왕자이고, 矗城王이 13 왕자이고, 東關王이 19 왕자이고,
陽州王이 14 왕자이고, 平康王이 11 왕자이고, 南昌王이 9 왕자하니라.
奇良王은 재위 89년에 붕(崩)하니 왕자가 18 이요,
왕손이 142人이니라. 수(壽)는 173 이니 전위 長子 탁기(卓己)하니라.
五代 卓己王은 재위가 58년에 壽는 147 이니 왕자가 20인 이니라.
十一 왕자가 震鮮에 전위하니라.
탁기왕께서 태백산과 아사달에 제천단(祭天壇)을 모아
환인, 환웅, 환검께 제사(祭祀)하였나니라.
또한 왕자 震鮮으로 하여금 중원 문화를 도입하여
漢文字와 儒之凢節을 본받아 14주 邦國에 통합 교육하고
널리 神敎(신교)를 펴시며 경전법(耕田法)을 가르치고
의복제도와 두발장속(頭髮粧束)하는
풍(風)과 가옥 構造하는 방법 등을 가르치시니라.
六代 震鮮王(진선왕)도 각 주군을 다시 분주(分州)하였으니
西鎭邦을 11州로, 衛州邦을 6州로, 尾刹邦을 13州로, 黑山邦을 4州로,
茂州邦을 13州로, 九月邦을 8州로, 明山邦을 15州로, 滿須邦을 16州로,
渭州邦을 10州로, 矗城邦을 7州로, 東關邦을 18州로, 陽州邦을, 12州로,
平康邦을 11州로, 南昌邦을 7州로 分하여 각 그 자손을 봉왕(封王)하고
매년 공세(貢稅)를 납입케 하시니라.
문학을 장려하고 중원과 상통이 빈번하였나니 옥백(玉帛)으로 상교 하였으며
중원 여성을 다수 입가(入嫁)하였나니 凢 600餘人에 달 하니라. 王
이 하고구(河古丘)가 기한(氣寒)함으로 다시 평강(平康)으로 천도하고
王의 弟 명선(冥鮮)을 州 王으로 封하여 맡기었느니라.
河古丘, 黑山, 衛州 등은 중원과 상통이 빈번하여 물화(物貨)상통은 물론이요,
풍속까지도 중원화 하니라.
전 州邦이 河古丘 14 州邦을 합하여 165 州邦에 혈통족이 이만 육천에 달하였나니
인구가 가장 적은 州邦이 동관주(東關州)이니 290餘人에 불과하니라.
왕자 14인중 장자 창(昶)에게 입사전위(入嗣傳位)하니라.
七代 창왕(昶王)이 즉위함에
시조 환웅천왕의 홍익인간주의(弘益人間主義)를 계승하여
다산정책(多産政策)을 써서 중원으로부터
매년 수백 명의 명문가(名門家)의 女를 입가(入嫁)하게 하여
왕족과 국민에게 다처(多妻)를 장려하여
증조(曾祖) 寄良王의 정책을 답습함에
그 중 昶王의 仲兄 宣民의 三十六子가 제일 多産함이니
이로 말미아마 종족이 급증하였느니라.
昶王은 26 왕자를 두었으며
장자 하기달(河璣達)에게 전위하시니 재위 42년 하니라.
八代 河璣達 왕은 六子, 25女 하시고 四子 무정(武貞)에게 전위(傳位)하니라.
九代 武貞王은 재위 4년만에 붕(崩)하니 무후(無后)한지라,
仲兄 건정(建貞)으로 王位하니 재위 27년만에 十六王子라,
장자 구마(久摩)에게 전위하니라.
十代 久摩王 즉위 六年에 중
원의 周 武王과 국교를 맺어 易學과 武藝를 수입하고
궁시창쇠(弓矢槍釗)등 무기를 만들어서
이전에 석기(石器) 전용으로부터
다소 철광을 개발하기 시작하였으니 시(是) 土鐵(토철)이라.
이로부터 금석기(金石器)를 병용하게 된지라,
농업을 장려하여 개간을 힘써서
원시의 依山 生活을 버리고 평야의 농경생활을 힘쓰니
이로부터 반농(半農) 山果를 主食하던 생활방식이 일변하여
곡류(穀類)를 주식(主食)하게 되었으며
초목피(草木皮)로써 포(布)를 짜서 의류를 만들고
소채(蔬菜)를 재배하며 가축을 길렀느니
인간의 각혼(覺魂)을 활용케 됨이
구마왕(久摩王)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니라.
인구가 점점 증가함에 중원으로부터 인간예의(人間禮儀)를 본받아
이 민족에게 적당한 법을 내시니 혈육간에 계촌(系寸)을 두어
祖 以下의 통혼을 막고 상(喪)을 당하면 애곡(哀哭)케 하여
哀痛의 정을 다하게 하니 이에서 桓族의 예(禮)가 시작하느니라.
또한 男女의 분별을 두어 각 그 할 일을 분간하느니라.
王이 165 州邦을 통할 治政하시니 或 불복(不服) 州邦이 있으면 이를 징계하시니
불만을 가진 州邦도 있었느니라.
재위 77년에 九王子를 두시고 장자 가파수(伽婆須)에게 전위하니라.
十一代 伽婆須 왕이 즉위하니
시조 단군 이후 453년에 불만을 품어오던
즉위 초부터 西鎭邦이 불평하여 공세(貢稅)를 불납하고
중원과 합세하여 이탈 州邦國 하거늘
왕이 미진태(味眞兌)를 보내어 설논(說論)하였으나 불응하고
오히려 미진태를 죽이거늘 왕이 대노(大怒)하여 군솔(軍率) 300餘人을 거느리고
西鎭을 치니, 西鎭이 당하지 못하여 중원으로 청병(請兵)함에
중원의 周王이 三千餘兵을 보내어 가파(伽婆) 王의 兵을 대파(大破)하니
생환자 불과 百餘人 이라, 이로부터 西鎭邦은 親中原으로 절교(絶交)하니라.
왕이 14 아들을 두었으며 二子 탈위(脫圍)에게 전위하니라.
十二代 脫圍 왕이 즉위함에 父王의 원수(怨讐)를 치고자
一百五十五 洲邦에 兵書를 講(강)하고 무기를 만들어서 모병교련(募兵敎練)하니
이로써 온 천지에 풍운의 형세가 자못 험악한지라,
一百五十五 洲邦 中에서도 투쟁을 반대하는 측도 점점 일어나느니라.
왕이 七王子를 두고 장자 솔니부(率尼夫)에게 전위(傳位) 하니라.
十三代 솔니부 왕이 즉위하여 一百四十六 州邦 연합군 五千餘 大兵을 몰아
불복한 州邦을 치니 대부분 항복하고
西鎭邦 만은 중원의 힘을 믿고 불복 항쟁하는지라,
伽婆 왕으로부터 130여년간 쟁난하다가 왕이 종말에는 西鎭을 영영 버리고
국경을 위주(衛州)로 하고 국교를 단절하시니라.
이리하여 쟁투는 종식하고 그 외에도 불복 州邦이 있으면
西鎭과 같이 단교 포기정책(抛棄政策)하니라.
왕자 26명을 두었으며 五子 가리달(嘉利達)에게 전위 하니라.
十四代 가리달 왕이 즉위함에 선정(善政)하여
一百四十九 州邦을 통솔 단결하사 농경방직(農耕紡織)을 장려 개량하고
학문을 힘쓰고 충효를 표창하여 美風을 이루고
시조 三神께 극진제사(極盡祭祀)하고 각자의 조상을 받들게 하여
死日로서 제사하게 하고
춘추 명절에도 그리하여 선령분묘(先靈墳墓)를 수호케 하시니라.
生 14 왕자 하시고 장자 마호선(摩胡宣)에게 전위 하시니라.
十五代 摩胡宣 왕이 즉위 후 11년에 이르러 九月 邦을 합치고,
다음 南昌 邦을 합치고, 滿須 邦과 渭州 邦을 또한 합쳐서
국명을 강진국(姜陳國)이라 하고
矗城邦과 東關邦과 陽州 邦을 합쳐서 東韓國 이라 칭하니라.
왕자 七人을 두시고 장자 수융(須隆)에게 전위 하니라.
十六代 須隆 왕이 즉위한 35년에 통합 운동이 일어나
茂州邦과 尾刹 邦이 합하여 扶天國이 되고
姜陳과 東韓이 합하여 鮮天國이 되고
河古와 黑山과 衛州가 합하여 易天國이 되니 이것이 三朝鮮이라,
통솔은 부천국(扶天國)이나 공세(貢稅)는 없애고
단지 물화교역 제도만을 두어 친목 형제하니 태평한지라.
이에 西鎭도 또한 화친하여 130여년간 쟁난(爭亂)이 없고 태평세월 하였으나
西鎭과 易天은 중원 풍속이 많고
扶天과 鮮天은 단군의 桓族 풍속이 많음에 자연 풍습이 통일치 못하느니라.
왕자 23인을 두었으며 장자 소가진(蘇伽眞)에 전위 하니라.
十七代 蘇伽眞 왕이 또한 善政함에 扶天과 鮮天 양국은 一家와 같이 자유왕래하고
상부상조하니 진실로 이것이 낙천(樂天)이라.
자연 풍류를 일삼음에 주색이 盛하고, 시화년풍(時和年豊)하고 민심이 순박하니
易天도 또한 본받아 合一行樂 하니 豪華行樂之世요 인간 존대가 지극이라.
왕자는 7인을 두었고 장자 유마부(琉瑪夫)에게 전위 하니라.
十八代 琉瑪夫 왕이 즉위하사 仁厚善政하여 농사를 권하고
절후 명절을 찾아 詩唱을 즐길새
名詩 名唱을 상 주시며 이어서 인재를 뽑아 등용할 새
문로(門路)를 국민에게 개방하니 이것이 과거제도의 始라.
그러나 문학하는 자 極貴함으로 각 州의 鄕에 書室을 두어 수학(修學)케 하니라.
문학하는 자가 영귀(榮貴)하게 됨에 왕도 無學하면 국민이 따르지 않는지라,
易天國은 無學함에 모든 일이 扶天을 따르지 못하니
자연 국민이 남하 扶天함에 易天은 自然敗國이 되어 扶天으로 귀화 통합 하니라.
왕자 6인을 두었으며 三子 진소태(震蕭兌)에게 전위 하니라.
十九代 震蕭兌 왕이 즉위함에 善政함이 또한 父王과 같은지라,
西鎭國도 귀화 통합하여
扶天과 鮮天 양국이 一家와 같이 병립함에 천하가 태평하니
南朝北朝의 구별은 있으나 이국지기(異國之氣)는 전무하니라.
왕자 4명이 있는 가운데 장자 가리부(伽利夫)에게 전위 하니라.
二十代 伽利夫 왕이 또한 선정하시니
진실로 국태민안(國泰民安)한 태평성세라.
神敎를 크게 펴 三神을 받들고 各州에서 천제당(天祭堂)을 짓고
또한 단수(檀樹)를 정하여 堂祭케 하고
산 고개마다 돌을 모아 제당(祭堂)을 이룩하여 堂神을 모시니
이것이 선왕당(仙王堂)이라. 그 유풍이 금일의 각 洞의 당사(堂社)들이니라.
또한 산제당(山祭堂)을 이룩하고 大江 大海의 水神
즉 龍王神을 받들게 하여 우환과 재난이 있으면
堂社神, 山王神, 龍王神, 仙王神 에게 도액(禱厄)케 하였으니
그 발원이 삼신님을 받듬에 있느니라.
왕자 8인을 두었으며 三子 선지(禪支)에게 전위하니라.
二十一代 禪支 王은 즉위 2년에 붕(崩)하시니
왕자가 유해(幼孩)함으로 왕의 弟 위지(渭支)에게 전위 하니라.
二十二代 渭支 왕이 또한 선정하사 各州에 충효지사를 표창하니
南朝之人이 항상 표창을 받게 됨으로 北朝之人이 내심 불만하여 시기(猜忌)하더니
北朝의 渾坪坮(만주 흥경지방)에서 우시기(于侍己)라는 자가 起兵하여
黑山州와 결탁하여 自立爲王 하고 黑山州에는 노사리(盧史利)가 王이라 칭하거늘
渭支王이 이를 정복하고자 병사를 모집하나
그러나 궁시(弓矢)를 익혀 숙달된 자가 불과 600여명 이라
급히 연병(練兵)하나 때는 이미 늦은지라,
우시기(于侍己)와 노사리(盧史利)의 병졸은
숙련 强兵이 6,000餘騎임에 이를 대항할 방도가 없음으로
국토를 분양하고 화친하니
이에 于侍己는 남만주(南滿洲)를 점유하여 西는 西鎭에 이르고
東은 압강(鴨江)에 달하였으며 盧史利는 黑山을 기점하여 북방전역을 점유하여
西國을 이루니 鴨江과 도문강(圖們江) 이북의 지역은 전부 상실한지라.
渭支王은 백두산 이남을 보유하여 한편으로는 선민정책을 쓰고
한편으로는 무사(武士)를 양성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더니
年老함에 長子 미태(彌兌)에게 전위 하니라.
이 시기에 于侍己의 난을 피하여 중원으로 간 자가 적지 않으니 기
자(箕子)의 七 代祖 부침(扶沈)등
數十 人도 그러하였나니 거개가 서진주(西鎭州) 사람이니라.
二十三代 미태왕(彌兌王)이 또한 善政 治民하되
항상 북방 二國을 정복하여 失地를 회복하고자 양병(養兵)에 전력하더니
마침 于侍己와 盧史利 양국간에 국경분쟁이 일어나
수년간 전투함에 국력이 소모하거늘
王이 승시(乘時)하여 一萬 七千 대군을 영솔하고
압강(鴨江)을 건너 于侍己를 치니 우시기는 항복하거늘
또한 盧史利를 치니 노사리도 항복하는지라,
이에 양국간의 분쟁이 40여년만에 종식하니라.
彌兌王이 국력을 기울여 장솔(將率)을 모아 국방을 강화하더니
王이 붕(崩)하고 왕자 28인 중 장자 후모(候慕)에게 전위 하니라.
二十四代 候慕王도 항상 무비(武備)에 유의하여 국방을 튼튼히 할새
국경 西鎭에는 중원의 침략을 방지하고
저 南朝의 장병(將兵)을 다수 파견 하니라.
또한 몽고(蒙古)로부터 조국을 찾아오는 부족이 七代 창왕(昶王) 당시부터 있었나니
十代 구마왕(久摩王)에 이르러서는 내왕(來往)이 빈번하여 2∼3 년만에는
반드시 찾아오는 인물이 있었으며 후모왕(候慕王)시에는 년간 數人이 되니라.
또한 西鎭 등지에서는 중원으로 전주(轉住)하는 자가 많았으며
물화교류로 인한 내왕도 빈번하였나니라.
왕자 5인을 두었나니 장자 하후간(河候干)에게 전위 하니라.
二十五代 하후간왕(河候干王)이 즉위하심에 성품이 인자하여
국민의 공세(貢稅)를 철폐하니 국내가 태평하니 격양가(擊壤歌)를 부르더라.
왕이 가무(歌舞)를 즐기사
단신(檀神)에 祭하실 새 풍악을 일 삼았나니, 이것이 後人의 굿이 되었느니라.
또한 점치기를 하여서 길흉을 판단하며 명복(命福)을 三神께 빌었나니
비록 國命은 아니나 王室에서 행함에 자연 국민이 본 받아서 행사로 변하였나니,
지금의 들놀이, 탈놀이, 등이니라.
또한 三神堂을 곳곳에 두고 정성(精誠)껏 받들었음에
神道가 더욱 발달 융성함에 강신(降神)이 되어 점신(占神)이 여기저기 나타났으며
그 판단이 명확함에 世人이 모두 따르게 되었느니라.
名占人을 국사(國師)로 받들어 天祭를 극진 치성하니
국민이 모두 神에 귀의하여 죄(罪)를 범하는 자가 없으며
또한 사감법(四鑑法)을 행하여 도(盜), 음(淫), 범상(犯上), 역천(逆天) 等事를 금하고
선행 자를 포상하고 충효를 장려하니 천하가 태평하여 성군(聖君)이라 칭 하니라.
왕자 二人을 두었으며 次子 주소리(周昭利)에게 전위 하니라.
당일이 단군 후 1,017년 7월 15일 이라,
이 날에 국민이 국제(國祭)로서 7월 백중(百中) 행사를 하니
至干今 백중 명절이라 하느니라.
그 때는 색병(色餠)을 만들고 폭포수(瀑布水)와
山谷間 水에 목욕하고 지성으로 치제(致祭)하였나니
이는 聖君의 聖德을 추모함이니라.
농가에서는 풍류(風流)로서 축하하였으며
천단(天壇)에는 占人들이 모여 성군(聖君)을 추모하는 행사를 하였느니라.
二十六代 주소리왕(周昭利王)이 즉위함에
또한 父王의 전통을 받아 국민을 지도할 새
친히 국토를 순회하사 평야를 개간하게 하시고 神道를 숭상하사
王權을 不用하고 평민과 동등한 위치에서
神道에만 힘을 기울여 궁전(宮殿)을 비우고 순유(巡遊)를 많이 하시니
곳곳마다 송성(頌聲)이 자자하니라.
왕자 12인을 두었고 장자 태주(太周)에게 전위 하니라.
二十七代 태주왕(太周王)이 즉위함에 祖王과 父王의 뜻을 받들어
神道에만 힘쓰시고 전국을 순회하사
국내 390州에 각 주(州)마다 항수(項首)라 칭하는 州의 長을 두어
그 州를 다스리게 하고 명산의 천제단(天祭壇)을 찾아 제사하게 하시고
친히 기도를 행하실 새
백두산 강선대(降仙臺)에 자주 나시여 백일 제계(齊戒)하시니라.
즉위 후 26년에 왕위를 버리시고 입선(入仙)하시니 당시의 87세로서
入於白頭山降仙臺 하여 시조 단군을 따라 入仙하시니
환웅 시조 후 1,281년에 王室이 자폐(自廢)한지라,
王의 弟 11인이 의논하나 모두 왕위를 불원(不願)하고
兄 王을 따라 상약입선(相約入仙)하니
이에 시조 환웅천제께서 仙人으로 강세 개국하셨다가
1,281년만에 자연 폐국(閉國)된지라,
諸 王子의 入仙 후에 無主之國家로서 왕위에 오를 자를 구하나
有德之人이 없으므로 67년간 州의 長인 항수(項首)가 다스리는 중
환웅천제 강세 1,219년에 三代 두솔왕(杜率王)의 후손
부침(扶沈)의 七 代孫 기자(箕子)가 중원으로부터
동래(東來)하여 祖國함에 지혜가 많고 인덕하며 중원문화를 갖추었음에
만인의 두령(頭領)이 될 만 함으로 國人이 받들었나니
이것이 기자지조선(箕子之朝鮮)이니라.
단군(檀君) 시조는 비서갑(匪西岬: 今 산해관)등지에
하백(河伯)이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복랑천(覆浪天) 49대 孫인 조소달(照素達) 仙人이 降世 山東 하였음에
그 9대손이었나니 환인 천제께서 환웅천제에게 지시하여
취(娶) 하백녀(河伯女) 혜간낭(彗干娘)하니라.
長子 부루(扶婁)로 위시하여 凢 6대까지는
거개가 山東 등지의 재상가(宰相家)에서 취후(娶后)하였느니라.
중원의 산동 등지에서는 아조선(我朝鮮)을 天帝之國이라 하여
宰相之家에서 다투어 입가(入嫁)를 원하였고
중원에서도 神國이라 칭(稱) 하였느니라.
문(問); 국조(國祖) 단군(檀君) 의 역사는 하교를 받들어 잘 알았사오나
기자사(箕子史)를 不知하와 다시 감문(敢問) 하옵나이다.
답(答);
기자(箕子) 입국은 환웅천제 후 1,219년 5월5일에 흥경(興京)으로 왔나니
종자(從者)가 十餘人이라, 지략이 과인(過人) 함으로 州民이 따를 뿐 아니라,
중원으로부터 그 덕을 사모하여 수종(隨從)하는 자가 줄을 이었나니
그 수가 수천에 달하였음에 王으로 모시게 되었나니
당시는 주인이 없는 땅이라 차차 세력이 번창함에
금(今) 만주일대를 지배하게 된지라,
입국한지 6년만인 1,225년 戊辰 8월 15일에 평양으로 천도하여
선정함에 남조(南朝)도 또한 귀부(歸付)하여 王으로 받들었느니라.
천도 후 2년에 전국을 순회하고 중원의 문화를 힘써 포교하니
국민이 모두 頌德하고 태평하니라.
후(后)는 매씨(梅氏) 眞이니, 五子를 生하고
長子 지하송(支夏松) 장혜(莊惠)에게 전위 하니라.
政事는 檀祖 千餘 年의 정사와 달라서 공예(工藝)에 힘쓰며
농사법과 인륜제도에 월등한 추보(追步)를 하였음에 의복치장도 화려하였고
생활 방편도 개선 중원화함에 단조(檀祖)의 고습(古習)은 자연 멀어지고
신제도, 신 풍속으로 일변하여 聖君의 덕을 頌 하니라.
古來의 공세제(貢稅制)를 폐하고 정전법을 시행하였으며
文武之術을 병행하여 국기(國基)를 튼튼히 하니라.
왕이 崩 함에 사체(死體)는 수장(水葬)하고 유물을 매립(埋立)하였으니
즉 지금 칭하는 기지능(箕子陵)이니라.
二代 장혜왕(莊惠王)이 즉위하여 또한 詩書를 힘쓰며 농(農)을 권하고
병(兵)을 양(養)하여 중원을 막았느니라.
二男 八女를 生하고 長子 경하노(敬河老)에게 전위 하니라.
三代 敬河老 왕은 無后 함으로 弟 태정수(泰貞須)에게 전위 하니라.
四代 恭貞須 왕은 六子를 生 한바 三子 문무간(文武干)에게 전위하니라.
五代 文武干 왕은 三子를 두고 장자 태소원(太昭原)에게 전위하니라.
(이후 41대 昭哀王 까지로 전위되고 있는 왕들의 명호가 있으나
중략하고
前記代 왕의 업적을 기술한다)왕의 업적(業跡)
三代 敬河老 王은 즉위 3년에 태평연(泰平宴)을 배설(排設)할 새
詩書로써 3월 3 齊日에 설과(設科)하여
국내의 수재(秀才)를 뽑아서 국정에 등용하고
무예를 과시(科試)하여 국방에 당케 함으로써 중원의 침략을 막으니라.
四代 공정수(恭貞須) 왕은 즉위 함에 또한 선왕을 계승하여 선정 하니라.
五代 문무간(文武干) 왕은 또한 영웅이라,
요하구(遼河溝)등지에 성곽을 쌓고 西胡를 막고
회둔(回屯: 흑룡강 유역)에도 성곽을 세워서 北胡를 막으니라.
九代 마소부(摩昭夫)왕이 즉위 함에
일본 해적의 침해를 당하여 동남 해안에 造船 방어(防禦)하였으니
조삭(潮朔: 마산등지)에 병거지(兵據地)를 두고
궁시(弓矢)와 창검을 만들어서 武備를 엄히 하니라.
十一代 소의루(昭誼婁) 왕은 內文 外武로 국기를 튼튼히 하고
인재를 등용하여 국민이 단결하니 중원도 능히 당하지 못할 위세를 갖추었으며
北胡와 西胡가 간혹 침벌하였으나 곧 격퇴하니라.
十五代 혜열구(惠烈久)왕 즉위 5년에 또한 西胡의 침벌을 받았으나
이를 정복하기에 凡 三年이 걸렸으며 또한 北胡가 내침하거늘
장군 위지돈(魏支頓)이 이를 격퇴하고 국란을 평정하니라.
왕이 집정 29년간에 쟁란이 그치지 않고 평정과 동시에 왕이 붕(崩)하시니라.
十六代 헌창국(憲昌國) 왕이 즉위함에 년유(年幼)함으로
장군 魏支頓이 국권을 장악하여 武政을 행하니라.
憲昌國 왕의 즉위 초에
일본의 하이국인(蝦夷國人)이 水路로 내습하여 재화를 약탈하거늘
해안의 방비를 엄히 하나 야음(夜陰)을 타고 불의에 내습 소탕하기를 수년 계속하니
실로 방어하기 곤란한지라, 헌창국왕(憲昌國王) 9년에 장군 魏支頓이 전사하고
적군(賊軍)은 해안 무인도에 잠복 출몰하거늘
왕이 국내 武人을 모아 격퇴코자 하나 방도가 없는지라,
이에 원적산(圓寂山)에 마부루(馬夫婁)라는 神人이 있음을 듣고
왕이 친히 심방(尋訪)하여 平賊之策을 물음에
馬夫婁의 神力으로써 해일을 일으켜
島中 賊軍을 침몰케 하니 죽은 자가 태반이라,
살아서 도망한 자가 불과 幾百人 이거늘
馬夫婁는 水軍 200여명을 거느리고 요격(邀擊) 항복을 받으니라.
그 후는 하이국인(遐夷國人)이 황겁하여
감히 내구(來寇)하지 못하고 화친을 청하였으나
왕이 불허하고 遐夷國을 쳐 후환을 없이 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崩 하시니라.
十七代 무간성(武干成) 왕이 즉위 함에 성품이 인자하여
遐夷國 사신(使臣)이 예폐(禮幣)로서
사과하고 화친을 청함에 왕이 이를 허용 하니라.
그 후 하문간(河文干: 21대) 왕까지 凡 백여 년간
하이(遐夷)가 예백(禮帛)을 진상하여 화친하고
桓族도 遐夷國으로 이주한 자도 수 백인에 달하니라.
二十一代 河文王 때는 北胡도 예폐(禮幣)를 진상하고 화친하였나니
北胡는 대개 桓族이요, 西胡는 桓族과 중원족이 잡거(雜居)하였나니
北胡는 그 후 일천 년간 형제의 나라로 서로 침벌이 없었으나
西胡는 왕왕 침벌이 있었느니라.… (중략)
三十五代 고산루(高山婁)왕 시에는 국내 파별(派別)이 생기어
南朝, 北朝 간에 권력 논쟁이 벌어지니라.
北朝에는 단군 시조 25대 孫이었던
기마진(奇摩眞)의 43대 孫인 선지헌(鮮支憲)이 領首가 되어 武班으로 出하고,
南朝에서는 箕子 시조 23대 孫 강하루(康河婁) 왕의
11대 孫인 한정우(韓定于)가 영수(領首)가 되어
文班으로 出하여 文武가 집권에 논쟁이 심하니
국왕도 능히 제어하지 못하고 국내가 어지러우니
이로 인하여 국세가 위태로운지라,
이 틈을 타서
北朝에 기봉수(奇奉須), 혜우양(惠于良), 장고부(壯高夫)등이 일어나고,
南朝에는 옥부주(玉浮周), 야진구(也眞逑)등이 일어나 투쟁을 벌이니
자연 국정은 혼란하고 민심은 분열한지라.
南北朝가 모두 유혈이 심하였느니라.
처음은 文武 간의 이념상쟁이었으나 종말에는 집권 싸움이 되고
또한 위주전(僞鑄錢)이 생겨 민심이 날로 혼란하니라.
三十七代 제아리(齊阿利)왕 말에
北朝에서 한 영웅이 출현하여 州를 다스림에 재능이 비범한지라,
인근 七州가 내부(來附)하니 이가 부여국(扶餘國)이라.
환검(桓儉)후 67대 孫이며 지략이 過人하였느니라.
그 이름이 해모수(解慕漱)였고 幼時에 仙을 좋아하여
항상 명산에 祭壇을 축(築)하고 天帝를 극진하였으며
백두산 강선대(降仙臺)에서 天祭 기도함에 시
조 단군께서 현성(顯聖) 傳敎하시기를
너는 壇으로 위군림(爲君臨)하리니 歸依 善民治政 하라,
하시는 말씀을 받아 出世함에 자칭 단군(壇君)이라 하고
天帝之子라 하였음에 후세에 檀君 해모수(解慕漱)라 하나,
檀君 시조로 오인 망기(忘記)한 書生의 기록이니라.
출생은 돈구(頓溝: 봉천)등지 이고
배(配)는 혼주하(渾注河: 대련)지방의 州長 숭구부(崇久夫)의 女를 취하였느니라.
二子 三女 하고 재취(再娶) 우평강(于平康: 평양 西)
유진(楡眞) 女 하니 生 二子 一女 하니라.
초취(初娶)의 아들 부루(夫婁)가 입사(立嗣)하여
南朝로 와서 단성(丹城)에 웅거 하니라.
단군(壇君)의 北朝 개국(開國)을 북부여(北扶餘)라 하고,
夫婁의 南朝之國을 동부여(東扶餘)라 하느니라.
再娶의 아들이 주몽(朱蒙)이니 始 設國 평강성(平康城)하니
이것이 고구려(高句麗)의 시작이니라.
三十八代 현수왕(顯須王)시에 이르러
부여의 국세가 점진(漸振)하니 凡 26州를 점령하였으며
四十代 종우통(宗于統)왕 시에는 北朝 전역을 점유하고
四十一代 소애왕(昭哀王)시에는 南北朝를 거개 점유하였나니,
昭哀王은 연국(燕國)의 침략을 당치 못하고
또한 북부여 해모수의 세(勢)를 막지 못하여 천도 남하하니
이것이 지금의 부여 땅이니 국호를 마한(馬韓)이라 하니라.
계시(啓示)에 檀字는 ‘당’으로 발음하여
檀君은 ‘당군’이라 하고 壇字는 ‘단’으로 발음하여
壇君은 ‘단군’이라 하시었느니 후생(後生)들은 이를 구분하여 알아둘지어다.
- 본론 - 탁옥경(琢玉經) - (가)|작성자 모악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