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아홉 개의 경전(전무지후무지법)

- 본론 - 탁옥경(琢玉經) - ()

모악산 2017. 7. 25. 6:51

 

탁옥경(琢玉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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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수로왕은 산시(産時)에 황보(黃褓)를 씌워 태어났다

하오나 史記에는 육란(六卵)으로 하강하여

선출자(先出者)가 수로(首露)라고 전래하오니

육태(六胎)가 동시 출생함인지 어찌된 사정이 온지 복문(伏問)하옵나이다.


미륵존불(彌勒尊佛)님 답();

首露 六卵 說은 오전(誤傳)이니라.

수로(首露)외 오가야(五伽倻)는 역시 天仙人이나 난생(卵生)이 아니고,

首露 출생 7일에 山神의 알림으로

인간들이 가서 아해(兒孩)를 데려다 기름이니 수태(受胎)首露와 같으니라.

조선에서 진난생(眞卵生)三人 외에는 모두 조작된 허언(虛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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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箕子)는 요하등지(遼河等地)에서 출생하여 입궐(入闕) 중원이라 하시오나

史記에는 주()의 제부(諸父)라 하여 紂王의 혈친(血親)으로 되어있사오니

入闕 중원(中原)한 경로를 알고자 하옵나이다.


미륵존불님 답;

기자지설(箕子之說)은 조국동래(祖國東來)하였나니,

6대조 익()이 왕위에 오름이로라.

부침(扶沈)이 요하(遼河) 출생하여 입궐 중원 하여

()內官으로 있었나니

그 국왕이 후비(後妣)로 득자(得子) 함에 왕비의 시기(猜忌)로 인하여

후비가 공포 중 마침 扶沈의 부인이 産後月餘인지라,

그 왕자가 생후 삭내(朔內)에 급간사(急肝死)함에

부침(扶沈)의 처 기야(奇也)부인의 합의를 얻어

후비(後妣)와 내시(內侍), 내관(內官)이 상의하여

扶沈()을 잠입 궁중 양육하여 성장 집정(執政)하였나니

이에 은국(殷國)의 왕이 환인(桓因) 혈통으로 바뀌었느니라.


이것은 궁중(宮中) 비밀이라,

그러한 연유로 箕子가 당당한 조국을 찾아옴이니라.

고로 그 비밀이 天宮에서 알고

인간은 後妣內侍內官, 扶沈, 奇也부인 외에는 아는 자가 없나니,

()은 후비(後妣) 임종에 유언으로 ()에게 환족(桓族)임을 전함에

()이 내심으로 짐작하고 桓族을 많이 입궐시켰느니라.

그러한즉 금세도 요하, 산동을 위시하여

동북일대(東北一帶)는 한족(韓族)이 태반이니

고려(高麗), 신라(新羅)가 영토와 민족을 저버렸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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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문제자(敢問弟子) 이우동(李禹東)의 전생(前生)英祖時 허목(許穆)

新羅 時 자주랑(紫周娘)이라 하시니,

그러한즉 허목과 자주랑의 행적은 여하(如何)하온지 알고자 하나이다.


미륵존불님 답();

신라의 자주랑은 저마왕(袛摩王)시의 인간이니 그 는 소관(蘇觀)이라.

당시 袛摩王이 유질(有疾)함에 東大山 감산중(甘山中)에서

蘇觀이 산제(山祭)하여 선약(仙藥)을 얻으니 이것이 동삼(動蔘)이라.

그 약으로 득효(得效)하여 병이 나음에 왕이 그 공()을 찬양(讚揚)하니라.

그러나 그 실은 蘇觀이 약을 얻음이 아니요,

蘇觀女 紫周娘(자주랑)의 효심으로 시부입산(侍父入山)하여

기도 37일에 대호(大虎)紫周娘을 태우고

형제산중으로 들어가 이후 大虎의 지시로 득약(得藥)하니라.

兄弟山 호굴(虎窟)에 웅호(雄虎)가 병중이라.

이에 자호(雌虎)가 자주랑을 업고가서 인혈(人血)을 음()할 터인데

人血 가운데서도 여자의 월경혈(月經血)이 약() 임이므로

자주랑에게 애원하는 모습으로 앞발로 음부를 가르치며

간청하는 형용(形容)을 하는지라.

자주랑이 허신(許身)함에 병이든 호랑이가 경혈(經血)을 할터 먹는지라,

이러기를 四 五次 함에 雄虎의 병이 괘차한지라.

이에 호랑이가 한 바위아래의 삼전(蔘田)을 지시함으로

채취한 후에는 자호(雌虎)가 자주랑을 다시 업고 감산(甘山)으로 와서

소관(蘇觀)앞에 내려 놓는지라, 소관이 놀래어 그 연유를 듣고

즉일 하산하여 왕께 진상(進上)하였나니

자주랑은 효녀라 고로 국립효녀비(國立孝女碑)하니라.


허목(許穆)은 함경도 명천(明川)사람으로

효심이 지극함에 15세에 能通詩書한지라.

16세 때에 그 부상(父喪)을 당하여 시묘(侍墓) 3년터니

또한 그 모친 상()을 당하여 시묘중 종상(終喪)을 마치지 못하고

이후 지나친 슬픔으로 병을 얻어 묘 앞에서 세상을 마침에

국립편석(國立片石)하여 名曰, 시묘정효자각(侍墓亭孝子閣)이라 하니

지금도 보존하니라. () 明川鏡城 중간에 보복산(報復山)이 있나니

그 묘() 아래 계곡 통로변에 상존하며

미수(眉叟)와 동성명(同姓名) 이인(異人)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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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말씀하신 조사이가상존사(伽床尊師)’솔라지(率羅支)’

어떠한 경력의 소유자이온지 하교 복망(伏望)하옵나이다.


미륵존불님 답();

조사의(趙史義)太宗 집정 후 太祖가 함흥 이궁(離宮)에 계실 때에

강비(康妣)의 친숙(親叔)趙史義가 함흥통사(咸興統使)로 재임함에

태조에게 進言하고 함흥 등지의 4개 군에서 기병(起兵) 수천 하여

태종 방원을 칠 새 송경(松京)을 향하여 진군하더니,

태종이 이 급보를 듣고 하륜(河崙)에게 松京을 유수(留守)케 하고

자신이 친히 出兵하여 청천강(淸川江)을 방어선으로 대전(對戰)하더니

엄동의 빙상(氷上)을 이용하여

趙史義 兵이 빙상 도강(渡江)할 때를 타서 요격함에

趙史義 兵이 빙함몰사(氷陷沒死)한지라.

태조가 이 패보(敗報)를 듣고 더욱 상심한 터에

이제 심노신노(心老身老)하였으니 장래사를 어찌하랴,

방원(芳遠)이 가증하니 松京으로 가기도 싫고

심통에 차는 분(忿)을 차사(差使)들에게 풀어

일일이 죽였으나 괴로운 심정은 갈수록 더하였다.


이것을 짐작한 태종이 한 방도를 안출(案出)하여

國師 무학(無學)을 보내어 태조를 개유(開喩)하여서 환궁(還宮)케 하고

태종도 하륜(河崙)의 말을 들어 태조께 를 다하였음이니

還宮 時에 철퇴위기(鐵槌危機)도 피함에 태조도 天意所在를 짐작하고

태종의 를 받게 됨이니라.

그러나 마음은 항상 고적과 우수를 견디지 못하여 궁()을 나와 소풍(消風)할 새

소요산에 이르러 절경을 ()하더니 사찰 짓기를 하명함에

태종이 技工을 보내어 일대 사찰을 건립하고 봉안(奉安) 관음불상(觀音佛像)하고

여생을 보내게 하더니 河崙이 태종께 진언하여서

國政上王의 의정(議政)을 받아야 를 다한다 하여

요산 별궁에 의정전(議政殿)을 짓고 태종이 의정전에 나가

上王의 의사를 받아 政事)를 하였나니 오늘날의 의정부(議政府)가 곧 이곳이니라.


의정전 건립 후

태조도 전일 趙史義의 서벌계획(西伐計劃)도 헛된 일이었음을 자각하고

태종의 의사를 받아 주었나니 이로써 李氏 帝王 3대의 평온(平穩)이 성취되었으며

또한 자기 여생을 생각하여 유택(幽宅)까지 걱정하고

國師 無學을 다시 청하여 택정(擇定)하니 곧 망우리(忘憂里) ()이니라.

가상존사(伽床尊師)

고구려 소수림왕 시에 처음으로 당()으로부터 불교가 들어옴에

고구려인으로서 처음 각()을 받은 승()이니,

해량(海亮)과 해관(海觀) 등이 伽床에게 그 진리를 배웠나니

출생한 곳은 상삼봉(上三峯) 등지니라.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이었나니,

이 유불(儒佛)을 겸하였고 후에 다시 으로 하여 불선유(佛仙儒)를 통한즉

그 후 명승(名僧)들이 단불(單佛)이 아니매 정각(正覺)이 아니라 하여

佛家非道理(비도리)로 규탄 받았나니

신라 원효(元曉) 名僧墜落(추락)시키었느니라.


왕연(王燕)은 고려 공민왕의 숙()이니 방원(芳遠)의 참화를 받아 죽었나니,

李氏를 보복하려다가 불성사(不成事)함이 구선복(具善復)이니

그 묘가 만월대에 있느니라.

솔라지(率羅支)는 고구려 始祖 王 당시 을파소(乙巴素)이니

지인용(智仁勇)이 겸전하였으며 君國을 생각한 사람이니

항상 乙巴素에게 질투(嫉妬)와 시기(猜忌)를 경계한 유덕한 사람이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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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國朝 천조대신(天照大神)과 풍신수길(豊臣秀吉)과 덕천가강(德川家康)

명치천황(明治天皇)에 대한 사실을 복문(伏問)하옵나이다.


미륵존불(彌勒尊佛)님 답();

천조대신은 복랑천(覆浪天) 46이던 구수암(久須唵)이니

중원 탕왕(湯王)三從叔되는 仙人이었나니

낙도(落島)하여 일본 족이 되었으나 그 수가 극소하니 현재의 아인족(阿人族)이고,


신무천황(神武天皇)은 중원의 진황(秦皇) 시에 서시(西施)이니

神武가 천조대신의 이라 한 일본 역사는 그릇됨이니라.

신무족(神武族)이 일본인이 말하는 대화족(大和族)이니

그 자손이 선정(善政)하여 번성하였느니라.


천조(天照)는 현 구주 동역(東域)에서 始出 하였으니

즉 살마(薩摩: 사쓰마)라 하는 곳이고,


神武 伊勢等地에 상륙하였나니 회유(懷柔)정책으로 天照측과 합의하에

서시(西施)가 통치하였느니라.

西施天照 구수암을 존상(尊上)하여 천상신인으로 받들었음에

후인이 그 자손인줄로 알았느니라.


풍신수길(豊臣秀吉)은 고려말 정몽주와 동당(同黨)이던 이무(李茂)이니

원사(怨死)함에 보복으로 일본국 수길(秀吉)로 나왔느니라.

그 생전의 원한이 李朝를 타도코자 하였음에

타국의 사바인(娑婆人)으로 출세함이니라.


德川家康 중원의 武王이 일본국으로 나왔나니 인후(仁厚)하였으며

일본 황제를 대행 執政하여 유도정신(儒道精神)을 함양시키고 국민을 깨우쳤느니라.


명치천황은 일본의 성덕태자가 再出 하여 그 나라를 開化하였으니 그

 포부가 국제 先進을 목적하였나니, 이등(伊藤)의 모의로 그 父王을 살해하고

또 조선을 침략함이니 모계술책(謀計術策)은 모두 伊藤에게서 나옴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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箕子 왕의 사체(死體)를 수장(水葬)하였다 하오니, 어찌 왕의 死體水葬하였나이까,

당시의 장법(葬法)을 복문(伏問)하옵나이다.

해모수(解慕漱)의 아들 부루(夫婁)가 남조(南朝)로 와서

단성(丹城)에 웅거하였다 하오니 丹城지명으로 어디이오니까,


解慕漱의 출생 부모 은 누구이오니까.

단군(檀君)시에 신지씨(神誌氏)의 문자가 있었다 하오니 과연 그러하오나이까,

평양 법수교(法首橋)에서 발견된 고비문(古碑文)

사범(似梵) 비전(非篆)한 문자는 무슨 문자이오니까.

미륵존불님은 도솔천제 33이온데

지금으로부터 기년전(幾年前)이온지 년수를 伏問 하옵나이다.


미륵존불(彌勒尊佛)님 답();

수장(水葬)檀君 시조 入仙하신 후로 그 자손들이 死體가 입선할 가 하여

名山 암석상에 방치하여 둔 것이 전래가 되어

자연 관례(慣例)가 된 것7대 창왕(昶王)시에 이르러 장법(葬法)을 내되

이위수(以爲水)는 만물의 근원이며 인체도 역시 물로 이루어진 몸이라 하여

맑은 大江 大海水葬키로 하니 이것이 水葬의 시초라,

그 후 1,700여년간은 수장례(水葬禮)가 계속되었으며

箕子王朝 말년에 이르러 매장(埋葬)을 장려하였으나

일부는 水葬, 일부는 방치, 일부는 매장하여 통일된 葬法이 없이 전래하였느니라.


고구려 소수림왕시에 불교가 입국하여 화장법(火葬法)이 생겨났느니,

신라 일천 년간도 이상과 같은 혼용장법(混用葬法)이였던 것이

고려왕조 立國 후 방치를 금하고 水葬은 고려중엽 이후에 철폐 하니라.

해모수(解慕漱)는 사함지(娑含支)의 아들이며

부루(夫婁)의 남조지단성(南朝之丹城)

철산(鐵山), 원산(元山) 서북방 70니라.

신지(神誌)는 단군(檀君)三代 莊王 時天人으로서

檀君天帝의 명으로 天上文字를 가져와 교습(敎習)하였으나 부전(不傳)하니라.


神誌氏의 문자는 天書니라, 莊王 후에도 몇 대간 전습(傳習)하였으나

그 뜻이 심오함에 습득이 쉽지가 않고 중

원문자가 들어옴에 자연소멸되어 부전(不傳)하니라.

법수교(法首橋)의 석비문(石碑文)檀君 27대말 왕 12형제가 모두 입선(入仙)함에,

그 때에는 도학(道學)과 선학(仙學)을 힘써서 모두 승선(昇仙)한지라,

마침 중원학자 마조사(馬祖史)가 사람을 찾아 조선국을 방문하였다가

12왕자가 모두 入仙함을 보고 감탄한 나머지 드

디어 도선지학(道仙之學)을 기록하니, 이것이 백자문(百字文)이라.


그 뜻이 수도(修道) 正心하여 덕을 베풀어

일심 통달함에 성취입선(成就入仙)함을 말함이라,

그 자서(字書)는 처음 중원의 원시(原始) 물형자(物形字)였던 것을

신서(神書)로 고쳐 썼느니라.

장차 이 강토에 남겨져 있는 깊은 사적(史蹟)

통도사(通道師)들의 활약에 의하여 일일이 찾아내어 온 세상에 밝혀지리라.

미륵존불(彌勒尊佛) 년 수는 육억(六億) 삼천육백(三千六百)

오십이만(五十二萬) 일천십구(一千十九)년 이로다.

(今中 元甲 丙午로부터 起算)참고부록(參考附錄)


忽 一 日에 성파(省坡) 서승영(徐承永) 法師

심신이 비월(飛越)하여 산곡(山谷) 소나무 숲 사이의 한 곳에 도착하니,

有一老人이 지팡이를 의지하고 서있는데 見師來 하고,


문왈(問曰) 師去何處,

師 答曰 금일에 甚無聊故 欲消風而來하나이다.

老人 曰, 此去少許過一山坡則 有好玩物하니, 試徃而觀之하소서.


師 如其言하야, 轉過一小山坂則 有一大廣場하고 각색 衆人聚散往來하며,

又有鷄犬牛羊等 家畜之物而洽似市日하거늘,

師 遂入于廣場하야, 徘徊見物하다가 又到一處하니 亦一座廣場也,

 이나 甚低下하야 略數十丈高하니, 不可緣壁而下.

忽見一處有一小哨所하고, 番人守之而有出入口어늘,


師 至而欲入하니, 番人拒之曰, 有出入證乎있가?

師曰, 無也하노라.

番人曰, 無則不得入하나이다. 師固請而不得하더니,

偶自哨所內一人出去하다가 見如此光景하고

自懷中으로 取出一枚出入證하야, 獻扵師曰, 可入而去라 하거늘,

乃與番人하니, 番人收之하고 以他證票로 교환하야,

獻扵師曰, 持此而人可也出來之時에난 非此證票則不可하나이다.


師 諾而遂入하니 與前到廣場風景으로 不甚相違하더라.

望見一處에 한 농부가 使一大黃牛耕沓하고,

한 사람은 手把一冊而立扵傍邊하야, 記其飜耕條數커늘,


師 就其傍하야 怪而問之러니,

其人曰, 何爲而來하였나이까? 師答以見飜而來라 하니,

其人曰, 有證票乎있가? 하거늘,

師以俄者門番人所與之證票視之하니,

其人曰, 然則可也, 我爲之案하리니, 可隨我而來하라거늘,

遂從而往하야 到一處則 別無可觀而以鐵條圍作一圈하고

圈內有一小乳犢한데

한 사람이 持棍棒痛打하니 幼犢이 비명에 聲甚哀切커늘,


師悶而問曰, 何爲而 如此無罪之小犢痛打乎있까?

其人曰, 師知此犢乎아 하거늘, 師答以不知하니,

其人曰, 此犢卽 李承晩也. 受 六億三千萬劫 하였나니,

端宗朝之申叔舟라 하고 又擧手而招山前 採草小童하야,

至則又問曰, 師知此童乎있까?


又答以不知하니, 其人使童子禮拜케 함에

以手脫其帽則 便是一個老人也,

師驚問其故하니,


其人曰, 金九라커늘,

 師尤 驚怪曰, 是 老人卽 白凡 金九先生乎있까?

其人曰, 하다 하고, 命着帽則 又是小一童子하니 年 可 十五六歲也러라.

其人又曰, 此童端宗朝 鄭麟趾이니


被小犢大而引牛車則 小童子爲之使役矣라 커늘,

師聞而惘然自失 하다가 홀연 경기하니 乃是南柯一夢이라.

起坐後喟然長歎하다가 說與在傍諸人함에 人皆嗟歎하니,

丙午 一月初旬事也. 與今般 尊佛所言으로 毫無差錯 하니,

果知三生윤회之理如此明白하리로다.


9개의 경전(經典)

불이문삼각경, 진각대리경, 옥추경 상(1, 2), , (1, 2)

탁옥경에 관계된 내용을 소개하였고

이것 이외의 것인 계단경(啓壇經)

儒佛仙, 西道에서 기도하기 위해 암송하고 있는

주요 기도문(呪文)과 증산교단(甑山敎團)에서는

미륵상제님께서 내려주신 주문(呪文)으로 하여

天地人을 일치시키는 삼합공부(三合工夫)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스스로를 고쳐 이타정신(利他精神)을 함양하여

()을 쌓아 一心正心으로 통달(通達)케 하는 呪文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선천(先天)에서의 仙佛儒에서 행했던

모든 주문수련과정이 집약된 것으로 인간을 성취입선(成就入仙)하게 하는 것이므로

先天에서 행해지는 온갖 수행법(修行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상제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며 입으로 시인하며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

파라 파라 깊게 파라 얕게 파면 죽느니 깊게 깊게 파야 하느니라.”

미륵상제님의 말씀은 "나한테 내가 있다, 나를 찾아라

내가 나를 찾지 못하면 이 천지를 못 찾느니라.”라고 하시는

고수부(高首婦)님이신 지장보살(地藏菩薩)님의 말씀으로 매듭지어진다.


[출처] [6] 아홉 개의 경전(전무지후무지법)

- 본론 - 탁옥경(琢玉經) - ()|작성자 모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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