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28절

김경빈 박장근

3:28 하루는 경석에게

溪分洙泗波(계분수사파) 峰秀武夷山(봉수무이산)

襟懷開霽月(금회개제월) 談笑止狂瀾(담소지광란)

活計經千券(활계경천권) 行裝屋數間(행장옥수간)

小臣求聞道(소신구문도 )非偸半日閑(비투반일한)의 고시(古詩)를 외워주시고

 

경석을 데리고 순창 농바우 박장근의 집에 이르러

가라사대 이제 천하대세를 회문산 오선위기형의 형세에 붙여 돌리노니

네게 한 기운을 붙이노라 하시고 그 집 머슴을 불러 가라사대

어젯밤에 무슨 본 일이 있었느냐

머슴이 대하여 가로대 어젯밤 꿈에 한 노인이 농바우를 열고

갑옷과 투구와 큰 칼을 내어주며

이것을 가져다가 주인을 찾아 전하라 하므로

내가 받아다가 이 방에 두었는데 곧 차경석의 앉은 자리나이다 하니라

대저 그 지방에서는 농바우 속에 갑옷과 투구와 긴 칼이 들어있는데

장군이 나면 내어가리라는 말이 전하여 오니라

 

해석

고시(古詩): 이 시는 탕왕이 지은 시이다.

바른정정

溪分洙泗波(계분수사파)

溪分泗水波 계분사수파

計經千券(활계경천권)→

計經千券 활계경천권

小臣求道(소신구문도)→

小臣求道 소신구문도

 

非偸半日閑(비투반일한)→

誹鬥半日閑 비투반일한

정정싯구 해석

溪分泗水波(계분사수파) 峰秀武夷山(봉수무이산)

計經千券(활계경천권) 行裝屋數間(행장옥수간)

小臣求道(소신구문도) 誹鬥半日閑(비투반일한)

해석

사수泗水는 나뉘어 흘러가고 봉우리는 무이산이 빼어났는데

비개이고 달 밝으니 가슴속의 회환은 사라지고

광란은 웃고 이야기 하는데서 그치는데

경서 수 천권에 계책은 우둔하고 가진 것은 초가집 수 칸 뿐이요

작은 산하가 도를 구하여 물음에

어찌 반나절을 남을 비방하고 싸움질하며

한가로이 보낼 수 있겠는가!

(부지런히 해도 먹고 살기에 바쁜 세상인데

가진 것은 없으면서 허망한 꿈에만 젖어 있구나!)

여러 종도들에게 경계의 말씀으로 해주신 싯구이다.

경석을 데리고: 경석이 아니고 김경빈을 데리고 보신 공사이다.

김경빈: 전생에 척부인 소생의 한고조 아들로

여태후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공자 여의이다.

2생 때도 박공우보다 키가 크고 덩치가 좋았다.

무신과 문신의 중간 정도의 인물이었는데 3생 현재에는 무신으로 나왔다.

네게 한 기운을 붙이노라: 공자 여의의 원한을 풀고 살려 주시겠다는 뜻이다.

박장근: 전생이 후한 초 농기구 (칼)를 만드는 대장장이었다.

현재 파키스탄에 태어나 있고 65세로 자식은 세 명이다.

머슴: 별로 뚜렷하지 않은 인물이다.

어젯밤 꿈에 한 노인: 한 노인은 한고조 이다.

정정

곧 차경석의 앉은 자리나이다: 곧 김경빈의 앉은 자리나이다

 

해석

농바우지방 전래된 말:

농바우 속에 갑옷과 투구와 긴 칼이 들어있다는 것은 뜬소문이었다.

한고조 유방의 아내 여태후-

한고조 유방의 황후인 여후(呂后)는 유방을 도와 패업을 달성하고,

유방이 황제가 된 후 황후로 봉해졌다.

하지만 이때부터 여후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미 나이가 들어 자색이 사라지니, 정치적 지위가 아무리 높다 해도

유방의 마음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후궁에 있는 수많은 미녀들 가운데서

유방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던 후궁은 젊고 아름다운 척부인(戚夫人)이었다.

유방은 그녀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고,

그녀는 유방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다녔다.

얼마후, 척부인이

아들 유여의(劉如義)까지 낳자 황제의 총애는 극을 달했다.

한때 장자인 유영을 태자에서 폐위 시키고,

유여의(김경빈)를 태자로 책봉하려고까지 했을 정도였다.

러나 여후가 여러 대신들의 반대를 이끌어 내,

어쩔 수 없이 생각을 거두었던 것이다.

여후는 이 모든 사태를 지켜보면서,

마음속에 증오심을 불태웠고, 척부인에게 복수 할 기회만을 엿보았다.

한고조 12년(기원전 195년) 4월, 유방이 병사하자

태자 유영이 황위를 계승해 혜제(惠帝)가 되었고, 여후는 황태후가 되었다.

그리하여 전권을 장악한 여후는 이제 척부인에게 복수할 때가 왔다고 여기고,

곧 척부인에게 복수의 칼날을 들이댔다.

5월에 유방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여후는 기다렸다는 듯이

척부인을 체포하여 머리를 온통 깎고 칼을 채웠으며,

붉은 죄수복을 입혀 영항(永巷)에 가두고, 온종일 쌀을 찧게 했다.

옥중에 갇힌 척부인은 멀리 조국(趙國)에 가 있는

아들 여의를 생각하며 애끓는 눈물을 한 없이 흘렸다고 한다.

당시 그녀는 이렇게 한탄 했다.

"아들은 왕인데, 어미는 죄인이 되어 온종일 쌀을 찧고 죽음과 벗하네!

하지만 삼천 리나 떨어져 있으니 어미의 처지를 어이 알까."

여후는 척부인의 통곡 소리를 듣고 더욱 화를 내며

"네가 정녕 아들에 기대어 살려고 하는 게냐?"라고 호통을 쳤고,

유여의를 없애 버리기로 마음 먹었다.

여후는 곧 세 차례나 사람을 보내 유여의를 장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유여의는 돌아오지 않았다.

여후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척부인의 필체를 위조해

거짓 서신을 써서 유여의에게 보냈다.

이제 갓 열세 살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했던 여의는 곧장 장안으로 달려왔는데,

혜제(여태후 아들)가 이를 알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이복 아우가 모후의 손에 죽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가 없어,

안으로 돌아오는 여의를 마중나가,

친히 궁으로 데려와 자신과 함께 하도록 했다.

그러자 여후도 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

혜제 원년(기원전 194년) 12월 초하루, 혜제가 일찍 일어나 말을 타고 나간 사이

여의가 홀로 늦게 일어났는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던 여후가 이 틈에 사람을 보내 유여의를 독살하였다.

혜제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여의가 죽은 지 몇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여후는 또 가장 잔인한 수단으로 척부인에게 복수할 계획을 세웠다.

척부인의 두귀를 불로 지지고, 벙어리가 되는 약을 억지로 먹였으며,

두 눈을 파내고 사지를 자른 후 변소에 버렸다.

척부인은 온종일 분뇨 속에서 뒹굴며 고통에 신음했다.

여후는 또 척부인에게 거의 변태적일 정도의 심리적인 보복을 가했다.

오랫동안 가슴 깊이 묻어 두었던 증오심을 일시에 폭발시킨 것이다.

여후는 척부인 모자를 동정하는 혜제를 데려다가 척부인의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다.

혜제는 이미 사람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이 된 척부인을 보고

비통하게 통곡하더니, 곧 몸져누워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혜제는 사람을 시켜 여후에게 "이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니며,

소자는 태후의 아들로서 다시는 천하를 다스릴 수 없나이다."라고 전하게 했다.

몇 년 후, 혜제는 매일 술에 취해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그 자신마저 몰락의 길에 들어섰다. 6년 후 갓 24세였던 혜제가 세상을 떠났으니,

여후는 자신의 정적을 잔혹하게 죽였을 뿐 아니라,

간적접으로는 자기가 낳은 아들까지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이 여자에 의해 한신.장량.소하.팽월 등 한나라를 세운 신하들이 무척 많이 죽거나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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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순전경 3장 한고조 후궁의 아들 여의|작성자 서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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