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극대도
2021. 5. 24. 12:42
2021. 5. 24. 12:42
대순전경 3장 113절~116절 두마음 성삼문
113 어떤 사람이 경석에게 이르되
그대의 장인(丈人)이 요술쟁이에게 요술을 배우려한다 하며
바람맞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노라 하니
경석이 가로대 내가 어찌 바람맞았으리요 말하는 그가 바람 맞았도다 하였더니
그 사람이 나간 뒤에 천사 경석을 꾸짖어 가라사대
너는 대인(大人)공부를 하는 사람이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제 노릇 하려고 하는 말을 네가 탄(嘆)하여 같이하면
너는 그와 같은 사람이 될지니 무엇으로 대인(大人)을 이루겠느냐 하시니라
해석
어떤사람 : 1생을 나온 해원인물이다
경석의 장인 : 1생을 나온 해원인물이다
너는 대인공부를 하는 사람 :
증산님뜻을 쫓아 뒤를 따르며 공부하는 사람
요술쟁이에게 요술을 배우려한다:
차경석의 장인을 지칭한다
바람맞은 사람이라고 말하는것 :
차경석 자신을 지칭한말이다
114 종도들이 천사를 모시고 출행할 때에
풍우한서(風雨寒暑)를 따라 괴로움을 느낄 때에는
말하는 대로 천기(天氣)를 돌려서 편의(便宜)를 보아주시더니
해석
없었던 내용이다
하루는 가라사대 너희들이
이 뒤로는 추워도 춥다 하지 말고 더워도 더웁다 하지 말고
비나 눈이 와도 괴로운 말을 내지말라 :
천지에서 쓸 데가 있어서 하는 일을
항상 말썽을 부리면 역천(逆天)이 되느니라 하시니라
해석
4장 천지공사에 들어갈 내용이다
115 하루는 공우를 데리고 어디를 가실 때
공우를 명하사 우산을 사서 들리고 가시니
공우는 천사 원래 우산을 받는 일이 없었고
비록 비오는 날에 길을 가실지라도
비가 몸에 범하는 일이 없었던 일을 생각하여 이상히 여기더니
뜻밖에 비가 오는지라 천사 공우에게 우산을 받으라 하시니
공우는 천사께 받으시기를 청하여 서로 사양하다가
함께 비를 맞아 옷이 함빡 젖으니
천사 가라사대 이 뒤로는 우산을 들지말라
의뢰심(依賴心)과 두 마음을 품으면 신명의 음호(蔭護)를 받지 못하나니라
해석
4장 천지공사에 들어갈 내용이다
이 뒤로는 우산을 들지말라 :
증산님께서 백성들이 가뭄에 농사를 짓지 못하거나
전세계적으로 가뭄으로 피해가 클경우
우사신명에게 공사를 보시고 비가 올때는
종도들에게 우산을 들지말라는것이다
116 하루는 종도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대인이 천하사를 경영하여 먼길을 떠남에
그 부모 처자는 의탁할 곳이 없는지라
종유중(從遊中) 한 사람이 그 일을 근심하여
구호(救護)할 길을 백방(百方)으로 생각하나
힘이 미치지 못함을 한탄하더니 마침 장에 가서 고기전을 지나다가
다시 그 일이 생각나서 길을 멈추고 공상에 잠기어 머뭇거리는지라
전(廛)사람이 이상히 여겨 연고를 물음에 그 정곡(情曲)을 말하니
전사람이 감동하여 함께 대인의 집에 가서 스스로 구호를 담당하여
생활비를 계속하여 공급하였더니
그 뒤에 대인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부모와 처자가 안녕하거늘
그 연고를 물어서 알고 그 사람에게 후히 갚었다 하시니라
해석
한 대인 : 한 대신이라고 해야한다
한 대신은 조선때 성삼문이다
천하사를 경영하여 먼길을 떠남에 : 천하사가 아니라 공부하기 위하여 먼길을 떠났다
종유중(從遊中) 한 사람이 :성삼문 밑에서 수학하던 유학자이다
현생에서는 순천도 장기준씨 문하생이기도 하였다
죽을때는 흑달에 걸려죽었다
전(廛)사람이 :
전사람이 감동하여 함께 대인의 집에 가서
스스로 구호를 담당하여 생활비를 계속하여 공급하였더니
위와같은 공덕으로 현재에도 태어나 있다
위 내용의 중요한점은 은혜를 갚으라는 것이다
성삼문[ 成三問 ]
죽음으로 매화의 지조와 대나무의 절개를 지킨 충신
출생 - 사망
조선 제일의 충의(忠義)를 지킨 인물,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은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목숨을 바쳐 신하의 의리를 지킨 사육신(死六臣)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이듬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 발각되어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한번 옳다고 여긴 신념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지키려고 했던
산봉우리의 낙락장송(落落長松) 성삼문.
그의 곧고 맑은 지조야말로 조선 선비들의 의리 정신을 보여주는 거울이 아닐 수 없다.
집현전 학사로 발탁되다
성삼문은 충청도 홍주 노은동(현재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근보(謹甫) 또는 눌옹(訥翁)이며,
매화나 대나무와 같은 강직한 군자의 기질을 흠모하여
호를 매죽헌(梅竹軒)이라 하였다.
본관은 창녕이며, 부친은 도총관을 지낸 성승(成勝)이다.
어머니는 현감 박첨(朴襜)의 딸이다.
그가 태어난 홍주 노은동은 고려 말의 명장이었던 최영 장군이 출생한 곳이기도 하다.
영웅이 탄생할 때 흔히 갖춰지는 탄생설화가 있듯이
성삼문도 태어날 때 공중에서 ‘낳았느냐?’ 하는 세 번의 소리가 있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의 이름인 ‘삼문(三問)’의 유래이기도 한데,
문헌으로 전하는 내용은 아니고 구전 설화에 가깝다.
성삼문은 1435년 18살 되던 해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3년 뒤인 21살 때에 하위지(河緯地)와 함께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집현전 학사로 발탁되었다.
안평대군을 통해 그의 학문과 인품 됨됨이를 전해 들은 세종이 직접 집현전 학사로 발탁했다.
이때 성삼문과 함께 집현전 학사로 발탁된 인물은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이석형(李石亨) 등이다.
성삼문은 이들과 함께 집현전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이후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면서
수찬(修撰)·직집현전(直集賢殿)으로 관직이 올라갔다.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을 만들다
세종 때에 신숙주,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들이 왕명으로 편찬하여
1448년에 간행한 [동국정운].
통일된 한자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 나라의 바른 음’이란 뜻을 담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사기초사전>
25살 때에는 박팽년, 신숙주, 이개, 하위지, 이석형 등과 함께
삼각산 진관사에 휴가를 받아 독서에 열중하기도 하였다.
이를 사가독서(賜暇讀書)라 하는데, 집현전 학사들에게 준 특별한 혜택이었다.
집현전 시절 성삼문은 세종의 명을 받고 훈민정음 창제를 위한 준비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1443년(세종 25)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
정인지, 신숙주, 최항, 박팽년, 이개 등과 더불어 성삼문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성삼문은 1445년(세종 27) 신숙주와 함께 요동을 13차례나 왕래하면서
그 곳에 유배와 있던 명나라 학자 황찬(黃瓚)으로부터 음운학을 배워왔다.
1447년 그의 나이 30살 때에 신숙주, 최항, 박팽년, 이개, 강희안 등과 함께
한국 한자음을 정리한 [동국정운東國正韻]을 편찬하는데,
수차례에 걸친 요동방문의 결과물이었다.
안평대군과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 간의 교류 또한 유명한데,
성삼문은 박팽년, 신숙주 등과 함께 안평대군의 정원에 있는 진풍경을 시제로 하여
<비해당 사십팔영(匪懈堂四十八詠)>과 그 서문을 짓기도 했다.
단종 복위를 꿈꾸다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성삼문은 성리학적 정치윤리에 충실하여 어린 임금을 보필하였다.
그러나 1453년(단종 원년) 왕위를 탐내던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金宗瑞)를 죽이고
아울러 집현전 신하들에게는 정난공신의 칭호를 내려 주었다.
공신의 칭호를 성삼문은 부끄럽게 여기고 이를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
수양대군이 정치적 야심을 키우는 사이
성삼문은 1454년에 집현전부제학이 되고,
이어서 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에 예방승지 자리에 올라 단종을 가까이서 보필하였다.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잃고
다시 아버지마저 잃은 어린 단종은 위협에 못 이겨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당시 단종의 옥새를 수양대군에게 전달하는 임무는
예방승지로 있었던 성삼문이 맡았다.
양위식을 담당한 성삼문은 옥새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세조가 울고 있는 그를 한참 동안이나 차갑게 노려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집현전 출신의 젊은 관료들과
단종 및 문종의 처가 식구들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 움직임이 조심스럽게 이뤄지고 있었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성삼문과 박팽년이었다.
승정원에 근무했던 성삼문은 나름대로 세조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고
명나라 사신이 한양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1456년 6월 1일에 거사를 이루기로 했다.
“성삼문과 박팽년이 말하기를
6월 1일 연회장의 운검(雲劒)으로 성승과 유응부가 임명되었다.
이날 연회가 시작되면 바로 거사하자.
우선 성문을 닫고 세조와 그 오른팔들을 죽이면,
상왕을 복위하기는 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을 것이다.”
([연려실기술] 단종조고사본말 중에서)
그러나 이들의 거사는 채 이루기도 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성삼문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던
김질이 단종 복위계획 사실을 누설해 버린 것이다.
김질을 통해 진상을 파악한 세조는 성삼문을 불러들여 결박하였다.
성삼문의 뒤를 이어 함께 거사를 도모했던
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박정 등이 끌려와 심문을 받았다.
“너희들이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는가.”
“옛 임금을 복위하려 했을 뿐이다.
천하에 누가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어찌 이를 모반이라 말하는가. 나의 마음은 나라 사람이 다 안다.
나으리가 남의 나라를 빼앗았고,
나의 군주가 폐위당하는 것을 보고 견딜 수가 없어서 그러는 것이다.
나으리가 평소 걸핏하면 주공(周公)을 지칭하는데, 주공도 이런 일이 있었소?
삼문이 이렇게 하는 것은 하늘에 태양이 둘이 없고
백성은 군주가 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리라.” ([대동야승] 중에서)
성삼문의 말에 화가 난 세조는
“지난 번 옥새를 가져올 때는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나를 배신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며 다그쳤다.
성삼문은 “때를 기다려 뒤를 기다렸을 뿐이다.”고 답했다.
성삼문은 부당하게 폐위된 단종의 왕위를 다시 찾고자 했다.
신하에게는 두 임금이 있을 수 없고
백성에게도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다는 명분이 있었다.
그는 단종의 신하로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원칙을 지키고자 했다.
“너는 나의 녹을 먹지 아니 하였는가?
녹을 먹고도 배반을 하였으므로 명분은 상왕을 복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스스로 정권을 차지하려는 것이 아닌가?”
“상왕께서 계신데 나으리가 어찌 나를 신하라고 하십니까?
또 나으리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으니, 만약 나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내 가산을 몰수하여 헤아려 보십시오” (남효온, 「육신전」 중에서)
성삼문의 당찬 말에 화가 치민 세조는 쇠를 달구어 다리를 뚫게 하고 팔을 자르게 했다.
극심한 고문에도 성삼문은 얼굴빛을 바꾸지 않고 “다시 달구어 오게 하라.
나으리의 형벌이 참으로 독하다.”고 태연히 말할 뿐이었다.
성삼문은 세조, 즉 수양대군을 자신의 군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녹봉으로 받은 것을 손대지 않고 그대로 보관하였으며,
세조를 향해 나으리라는 호칭으로 군신관계가 결코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그에게 있어 세조는 어린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불의한 인간이자 역모자일뿐이었다.
실제로도 그가 죽은 뒤에 가산을 빼앗아 보니
1455년 즉 세조 즉위년부터 받은 녹봉을 별도로 한 곳에 쌓아두고
‘어느 달의 녹’이라고 기록해 놓았으며 집안에는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고,
오직 거적자리만 있을 뿐이었다고 전한다.
성삼문이 한창 고문을 받고 있을 때
오랜 벗이자 동료였던 신숙주가 세조 옆에 있었다.
그를 본 성삼문이 노려보며 말했다.
“옛날에 너와 함께 집현전에 있을 때
영릉(세종의 능호)께서 원손을 안고 뜰을 거닐면서 세월이 흐른 뒤에
너희들이 이 아이를 잘 생각하라는 당부가 아직 귓전에 남았는데,
네가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호통을 들은 세조는 신숙주를 피신시켰다.
성삼문은 거사를 앞두고
“신숙주는 나와 서로 좋은 사이지만, 죽어야 마땅하다.”고 하였다.
비록 두 사람이 개인적으로는 좋은 벗이었지만, 세종의 당부를 잊었을 뿐 아니라
불의의 편에 선 신숙주의 처세는 신의를 져 버린 것이므로
성삼문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혹독한 고문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세조의 불의를 꾸짖고
세종과 문종, 그리고 단종을 향한 신하의 충성을 지킨 성삼문.
세조가 성삼문에게 함께 공모한 자를 물었을 때
그는 “박팽년 등과 우리 아버지뿐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세조가 공모한 자를 재차 물으니
“우리 아버지도 숨기지 않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겠는가”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때 제학 강희안(姜希顔)이 관련되어 고문을 받고 있자,
성삼문이 “나으리가 선대의 명사를 다 죽이고 이 사람만 남았는데,
그는 이 사건을 모의하지 않았으니 남겨 두어서 쓰게 하시오.
이 사람은 진실로 어진 사람이다.”하여 강희안은 석방되었다.
성삼문이 죽으러 나갈 때 좌우에 있던 옛 동료들을 돌아다 보며,
“너희들은 어진 임금을 도와 태평성대를 이룩하라.
이 성삼문은 돌아가 옛 임금을 지하에서 뵙겠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또 그는 수레에 실릴 때 다음과 같은 절명시를 남겼다.
둥 둥 둥 북소리는 사람 목숨 재촉하는데
머리 돌려 돌아보니 해는 이미 기울었네
머나먼 황천길에 주막 하나 없으니
오늘밤은 뉘 집에서 재워줄꼬.
당시 그에게는 대여섯 살쯤 되는 딸이 있었는데, 수레를 따르며 울며 뛰었다.
성삼문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내 자식은 다 죽을 것이고,
너는 딸이니까 살 것이다”라며 달랬다.
집안의 종이 울며 술을 올리자 몸을 굽혀서 마시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임이 주신 밥을 먹고 임 주신 옷을 입었으니
일평생 한 마음이 어길 줄 있었으랴
한 번 죽음이 충의인 줄 알았으니
현릉(顯陵)의 송백(松柏)이 꿈속에 아련하네
위의 시는 성승이 지은 시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은 모두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거나 자결하였다.
성삼문을 비롯하여 박팽년·유응부·이개는 작형(灼刑:단근질)을 당하였고,
뒤에 온 몸을 찢어서 죽이는 거열형을 당하였다.
하위지는 참살당하였으며,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하였다.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를 당하였고,
그의 아들 5형제와 아우 삼고, 삼빙, 삼성 등
남자는 젖먹이까지도 살해되는 멸문지화를 겪었다.
가산은 몰수되고, 처 차산과 딸 효옥은 운성부원군 박종우(朴從愚)의 노비가 되었다.
후손으로는 딸 효옥 외에 박림경에게 시집간 맏딸과
유자미의 며느리가 된 손녀, 엄씨에게 시집간 딸 등이 유일하게 살아남았을 뿐이다.
성삼문은 흔히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와 비견되곤 한다.
정몽주는 사후에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성삼문의 시호는 충문(忠文)이었다.
정몽주가 절개를 지키는 마음을 담은 단심가를 지었다면,
성삼문은 죽기 전 다음과 같은 유명한 절의가(絶義歌) 한편을 남겼다.
이 몸이 주거 가서 무어시 될고 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第一峯)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야 이셔,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
— 성삼문, <청구영언>
성삼문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절신(節臣)으로서
오늘날까지 한국인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세종대에 발탁된 문신으로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조정의 경연(經筵)과 문한(文翰)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큰 역할을 하였으나,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발하여 단종 복위를 꾀하다 죽음을 당하였다.
뒷날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은 [추강집(秋江集)]에서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의 죽음을 택한 절개를 기록에 남겼다.
성삼문은 2백년이 지난 뒤인 숙종 때가 되어서야 역모의 혐의가 풀렸다.
사육신(死六臣)의 무덤이 수축(修築)되고 묘지 위에 사당을 세우게 되었고,
삭탈된 관직이 회복되었다.
또 영조 때에는 그에게 이조판서의 관직이 추증되었고, 충문의 시호가 주어졌다.
그의 묘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있으나 그의 일지(一肢)를 묻었다는 묘가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에도 있다. 저서로 [매죽헌집(梅竹軒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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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 [成三問] - 죽음으로 매화의 지조와 대나무의 절개를 지킨 충신
(인물한국사, 정성희, 장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