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절~3:10절 우리의 득의(得意) 추(秋)가 아닐런가, 시절화명삼월우 풍류주세백년진

3:8

하루는 임피 오성산에 가셔서 세상이 칭찬 할 만한 곳이라 하시니라

 

해석 하루: 을사년 가을에 오성산에 오르셔서 하신 말씀이다.

세상이 칭찬 할 만한 곳: 다섯 성인이 나올 기운을 간직한 곳이라는 뜻으로

이 다섯 성인이 3생으로 다시 태어날 것을 뜻하는 말씀이다.

 

다섯 성인: 요임금, 순임금, 우 임금, 문왕과 이윤, 자사​

앞선 글에서 언급했듯이 문왕과 이윤 중에서 문왕을 성인으로 하기에는

문왕에게 부족함이 있고 이윤을 성인의 반열에 올리기에도 이윤의 부족함이 있어

이 두 사람을 하나로 묶는 일을 하신 것이 문왕과 이윤의 공사이다.

 

당요: 서울에 태어났다.

순임금: 북한에 태어났다.

우임금: 충북 진천으로 나왔다.

문왕과 이윤의 기운을 가지고 한 사람이 태어나 있다: 경기도 발안

자사: 중국에 태어나 있다

 

문왕-주나라의 기초를 닦은 명군.

본명 : 창(昌) 별칭 : 서백(西伯) 이름 창(昌). 계왕(季王)의 아들, 무왕의 아버지,

어머니는 은(殷)나라에서 온 태임(太任). 서백(西伯)이라고도 한다.

 

은나라에서 크게 덕을 베풀고 강국으로서

이름을 떨친 계(季)의 업을 계승하여, 점차 인근 적국들을 격파하였다.

웨이수이강[渭水]을 따라 동진하여 지금의 시안[西安] 남서부 펑이[豊邑],

즉 호경(鎬京)에 도읍을 정하였다.

은나라의 주왕(紂王)이 산둥반도[山東半島]의 동이(東夷)민족 정벌에 여념이 없는 틈을 타,

인근 제후의 지지를 받아 세력을 길러 황허강[黃河]을 따라 동으로 내려가,

화베이[華北]평원으로 진출하였다.

그 도하점(渡河點) 맹진(孟津)을 제압하고, 은나라를 공격할 태세를 정비하였다.

말년에는 현상(賢相) 여상(呂尙: 太公望)의 도움을 받아 덕치(德治)에 힘썼다.

뒤에 은나라로부터 서방 제후의 패자(覇者)로서 서백의 칭호를 사용하도록 허락받았다.

은나라와는 화평주의적 태도를 취하였으며,

우(虞) ·예(芮) 등 두 나라의 분쟁을 중재하여 제후들의 신뢰를 얻어 천하 제후의 2/3가 그를 따랐다.

 

죽은 뒤 무왕이 은나라를 쓰러뜨리고 주나라를 창건하였으며, 

그에게 문왕이라는 시호를 추존하였다.

뒤에 유가(儒家)로부터 이상적인 성천자(聖天子)로서 숭앙을 받았으며,

문왕과 무왕의 덕을 기리는 다수의 시가 《시경(詩經)》에 수록되어 있다.

 

이윤- 이윤은 유신씨(有莘氏) 씨족(지금의 산동성 조현, 하남성 진류 일대) 출신으로,

전설에 따르면 황제 시대의 대장 역목(力牧)의 후손이며

원대한 포부를 품은 박학다식한 인물이라고 한다.

이윤은 “천하의 중책을 자임하고” “하를 정벌하고 백성을 구하는” 일이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천하 백성이 요·순 때와 같은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자신이 그들을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맹자』 「만장」 상).

 

그의 재능은 상탕의 눈에 들기 전부터 벌써 나라 밖까지 알려져 있었다.

상탕은 “우리나라에 이윤이 있다는 것은 훌륭한 의사와 좋은 약에 비유할 수 있다

(『묵자』 「귀의」)”고 여길 정도였다.

 

개국 단계에서 그는 군사정책을 결정하고 전쟁을 지휘하는 일에 참여했으며,

적진의 전략을 정탐하는 ‘용간(用間)’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함으로써

탁월한 모략사상과 정치·군사적 재능을 아낌없이 발휘했다.

건국 단계에서는 몇 대에 걸쳐 상왕들이 국가를 다스리는 데 협조하여 천하를 통일했으며,

3년간 섭정으로 있으면서

상왕이 중국 역사상 두 번째로 통일된 노예제 국가를 세우는 데 이바지했다.

 

중훼(仲虺)·여구(汝鳩)·여방(汝方) 등

상탕의 중요한 조력자들 중에서 이윤은 단연 으뜸이었고 공도 가장 컸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윤 [伊尹] –

 

3:9

하루는 심심하니 세상이 한번 욱끈하게 웃을 일을 꾸며 보리라

너희들은 앉아서 웃어 보아라 많이 미칠 것이라 하시니라

 

해석 심심하니: ‘심심하니’ 라는 표현은 잘못 묘사되었다.

항상 공사는 엄중하고 바쁘게 하신 일로써 이런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욱끈하게:; 병겁이 터질 때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 같이 갑작스럽게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일.

웃을 일을 꾸며 보리라~ 앉아서 웃어 보아라 : 이 때에 살아남는 사람들은 웃게 되니

일심을 가지고 살아남아 웃으라는 뜻이다.​

 

많이 미칠 것이라 하시니라: 많이 죽는 일이 생기니 미쳐버릴 것이다.

이 부분은 그 당시 종도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종도들 중에는 해원을 하고 다음에 다시 태어날 수도

후천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인물들이 많았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물론 현생에 태어난다 해도 지금 생을 어떻게 사는 냐가 무척 중요하다.

자신을 완성하지 못하는 사람은 후천이 집행될 때 그 기운을 받아내지 못하게 된다.

 

3: 10

하루는 천사 어렸을 적에 지은 글이라 하사

「운래중석하산원 장득척추고목추」運來重石何山遠 粧得尺椎古木秋를 외워주시며

「선생문명이 아닐런가」라고 심고하고 받으라 하시고

「상심현포청한국 석골청산수락추 霜心玄圃淸寒菊 石骨靑山瘦落秋를

「선령문명이 아닐런가」라고 심고하고 받으라 하시고

「천리호정고도원 만방춘기일광원 」千里湖程孤棹遠 萬方春氣一筐圓을

「선왕문명이 아닐런가」라고 심고하고 받으라 하시고

「시절화명삼월우 풍류주세백년진」時節花明三月雨 風流酒洗百年塵을

「선생선령선왕 합덕문명이 아닐런가」 라고 심고하고 받으라 하시고

「풍상열력수지기 호해부유아득안 구정만리산하우 공덕천문일월처」

風霜閱歷誰知己 湖海浮遊我得顔 驅情萬里山河友 供德千門日月妻 를 

「우리의 득의(得意) 추(秋)가 아닐런가」 라고 심고하고 받으라

 

바른정정

하루는 천사 어렸을 적에 지은 글이라 하사: 이 글은 원효대사가 지은 글이다.

한 실제 내용과는 조금 다르게 변조 되었다.​

선생문명이 아닐런가」라고 심고하고 받으라 선령문명이 아닐런가」라고 심고하고 받으라

선왕문명이 아닐런가」라고 심고하고 받으라

시절화명삼월우 풍류주세백년진」時節花明三月雨 風流酒洗百年塵

선생선령선왕 합덕문명이 아닐런가 라고 심고하고 받으라

「우리의 득의(得意) 추(秋)가 아닐런가」 라고 심고하고 받으라

위의 모든 내용은 말씀하신 적이 없다.

 

하신 뒤에 「시세 를 짐작컨데 대인보국정지신 마세진천운기신

大人輔國正知身 磨洗塵天運氣新 유한경심종성의 일도분재만방심  

遺恨警深終聖意 一刀分在萬方心 」 이라 창하시며

가라사대 이 글은 민영환의 만장이니 「일도분재만방심」 으로 세상일을 알게 되리라 하시고

(이 뒤에 민영환이 순절 함)

또 가라사대 「사오세무 현관 四五世無顯官하니 선령先靈은 생유학사학생 生幼學死學生이요

이삼십불공명二三十不功하니 자손子孫은 입서 방출 석사入書房出碩士」라 하시니라

일도분재만방심一刀分在萬方心: 한 칼에 목숨을 버린 그 충정을 만방이 알라

 

이 글은 민영환이 죽기 전이 아니고 죽은 뒤에 증산님이 만장글을 읊어 주신 것으로

「일도분재만방심 一刀分在萬方心」 으로 세상일을 알게 되리라 하신 것은

한 칼에 목숨을 버린 민영환의 뜻을 본받는 사람이 곧 세상일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민영환의 만장을 읽으실 때 참석한 종도가

최창조 최내경 안내성 김보경 김형렬 차경석등 20여명 이다.

 

「사오세무 현관하니 四五世無顯官 선령先靈은 생유학사학생 生幼學死學生이요

이삼십불공명二三十不功하니 자손子孫은 입서 방출 석사入書房出碩士」라 하시니라:

민영환의 만장과 맥락이 이어지지가 않을 뿐 아니라 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민영환은 현재 3생으로 태어나 있다.

 

민영환-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 1861년(철종 12)∼1905년(광무 9).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 시호는 충정(忠正), 본관은 여흥(驪興), 병조판서

민겸호의 아들. 1878년 고종 15년 문과에 급제.미국 공사로 있다가

1896년 고종 33년 2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례 군부대신으로 있을 때

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여러 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와 신문명에 밝았으며,

처음으로 양복을 입어 사신으로 외국에 가는 사람의 변복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귀국 후 참정(參政)에 올랐고 훈장 조례를 처음으로 공포하였으며

사신으로 해외에 여러 차례 나가서 공을 세워 훈 1등에 이르렀다.

 

외부·학부·탁지부 대신을 역임하여 나라의 운명을 바로잡으려 분투하였으나

독립당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대신의 자리에서 밀려났다.

왕의 시종무관장으로 있을 때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기는 형세에 이르니,

우정대신 조병세와 함께 조약의 폐기를 상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1905년 11월 4일 새벽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고하는 유서를 남기고 단도로 자살하였다.

뒤에 시호와 함께 영의정을 받았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을 받았다.

 

위 유품 혈죽(血竹)은 충정공이 자결을 한 자리에서 피어난 대나무의 잎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자 일제가 베어내려 했으나 부인이 따로 보존하여 오다,

충정공의 종손인 민병기씨가 조모로부터 물려받은 유품들을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민영환이 자결하고 8개월이 지나자, 피묻은 옷을 간직한 방에서 청죽이 솟아올라 인심이 술렁이자

일제 날조. 민영환 어른이 자결한 후 피묻은 옷을 간직했던 마루에서 대나무가 솟아 올랐다.

김은호 화백, 김우현 목사 등 청죽을 목격한 분들이 많았다.

 

민영환의 피를 먹고 대나무가 솟아났다는 이른바 혈죽 사건은 당시 언론에도 보도되어 화제가 되었다.

1906년 7월 5일자 대한 매일신보(현 대한매일)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공의 집에 푸른 대나무가 자라났다.

생시에 입고 있었던 옷을 걸어두었던 협방 아래서 푸른 대나무가 홀연히 자라난 것이라 한다.

이 대나무는 선죽과 같은 것이니 기이하다’

신문 보도대로 민영환이 순국한 지 8개월 후, 피묻은 옷을 간직했던 방에서 청죽이 솟아올랐다.

대나무의 45개의 입사귀는 순국할 때의 나이와 같은 숫자여서 더욱 신기하게 여겨졌다.

 

혈죽으로 인해 조선 사회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당황한 일제는 혈죽이 조작된 것처럼 만들고자 했다.

그들은 대나무가 뿌리를 통해 번식한다는 점을 주목, 집주변에 대나무가 있는지 면밀히 조사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대나무는 찾지 못했다.

마루를 뜯어 내고 주위를 파내며

다른 대나무가 뿌리를 뻗어서 솟아난 것은 아닌가 확인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민영환의 손자 민병진씨는

“일제는 혈죽의 조작 증거를 잡지 못하자 대나무를 뽑았는데 쑥 뽑혔다고 한다.

만약 뿌리를 통해 번식했다면 대나무가 뽑혀 나올 리 없다”고 말했다.

잊혀졌던 혈죽이 다시 세상에 얼굴을 내민것은

광복 이후, 일제가 뽑아버린 대나무를 고이 수습한 충정공의 부인 박수영 씨에 의해서다.

박씨는 자줏빛 보자기로 대나무를 싸고 폭 8센티 길이 50 센티 정도의 나무 상자 속에 넣어 보관 했다.

고이 간직해온 혈죽은 유족들이 1962년 고려대 박물관에 기증, 옮겨지게 됐다.

고려대 박물관에는 혈죽과 1906년 7월 15일 일본인 사진기사 기쿠다가 촬영한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네이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