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극대도
2021. 5. 24. 12:02
2021. 5. 24. 12:02
3:4~3:7절
장익모 소진섭 김성화
3:4 장익모가 그 어린 아들을 심히 사랑하거늘
천사 일러 가라사대 복은 위로부터 내리는 것이요 아래에서 치오르지 아니 하나니
부모를 잘 공경하라 하시니라
해석
장익모와 그 어린 아들: 정익모의 아들은
중국고대 상나라를 세운 탕임금 시대 제후 밑에서 중간 벼슬을 했던 사람이다.
아랫사람을 잘 보살펴주고 관리를 잘 하였으며 덕이 많았다.
한 번은 제후에게 어떤 일을 잘못 고하고 아뢰는 바람에
그 실수를 물어 형벌에 처해 진적도 있었다.
증산님 때와는 반대로 탕임금 당시에는 장익모 아들은 장익모의 부친으로
장익모는 그의 아들로 살았던 묘한 인연이 다시 2생으로 이어졌다.
장익모는 현재 3생으로 나와서 살고 있다.
부모를 잘 공경하라:
앞으로 자식만 귀히 여기고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 세상이 될 것을 아시고
경계의 말씀을 미리 하신 것이며
조상 제사도 잘 받들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3:5 천사 비록 미천한 사람을 대할지라도 반드시 존경하시더니
형렬의 종 지남식에게도 매양 존경하시거늘
형렬이 여쭈어 가로대 이 사람은 나의 종이오니 존경치 말으소서
천사 가라사대 이 사람이 그대의 종이니 내게는 아무 관계도 없느니라 하시며
또 일러 가라사대 이 마을에서는 어려서부터 숙습이 되어
창졸간에 말을 고치기 어려울지나
다른 곳에 가면 어떤 사람을 대하던지 다 존경하라
이 뒤로는 적서의 명분과 반상의 구별이 없느니라
정정과 해석
형렬의 종: 김형렬은 가난하여 종을 둘 처지가 아니었다.
지남식: 전생은 은나라 주왕 때 순민이었다.
지남식은 김보경의 종이었으므로
위 말씀은 김형렬이 아니고 김보경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 뒤로는 적서의 명분과 반상의 구별이 없느니라:
다가 올 근대와 현대 사회의 모습을 말씀 하신 것이다.
3:6 하루는 형렬이 어떤 친족에게 합의치 못한 일이 있어서 모질게 꾸짖거늘
천사 일러 가라사대 악장제거무비초요 호취간래총시화니라
말은 마음의 소리요 행사는 마음의 자취라 말을
좋게하면 복이 되어 점점 큰 복을 이루어 내 몸에 이르고
말을 나쁘게 하면 재앙이 되어 점점 큰 재앙을 이루어 내 몸에 이르느니라
해석
악장제거무비초요 惡將除去無非草
나쁘게 보아 없이 여기면 쓸모없는 풀 아닌 것이 없고
호취간래총시화니라 好取看來總是花
좋게 보아 좋게 여겨 취하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사람을 평함에 있어서 쓸모없다 무시해 버리지 말고
부족함이 있더라도 잘 취해 쓰면 좋은 것이다.
단점을 생각지 말고 장점을 취하면 못될 일이 없다.
3:7 을사년 봄에 함열 회선동 김보경의 집에 이르사
여러 날 동안 머무르실 때 보경이 함열읍 사람 김광찬을 천거하여 추종케 하고
또 소진섭과 임피 군둔리 김성화가 차례로 따르니라
해석
김보경: 2장 32절에 나옴. 1생을 나온 인물이다.
여로 날 동안: 24일 동안이다.
소진섭과 김성화가 올 것을 아시고 24일을 기다리셨다가 만나셨다.
소진섭과 김성화: 전생에 이 둘은 형제지간이었다.
상나라 당시 백이와 숙제를 도와준 형제들이다.
백이와 숙제- 위키백과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상나라 말기의 형제로,
끝까지 군주에 대한 충성을 지킨 의인으로 알려져 있다.
백이와 숙제에 관한 이야기는 《사기》의 열전에 나온다.
백이와 숙제는 원래 서쪽 변방에 살던 형제로,
변방의 작은 영지인 고죽군의 후계자였다.
고죽군의 영주인 아버지가 죽자, 이 둘은 서로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끝까지 영주의 자리에 나서지 않으려 했다.
이때 상나라의 서쪽에는 훗날 서주 문왕이 되는 희창이
작은 영주들을 책임지는 서백의 자리에 있었다.
희창이 죽고 그의 아들 희발(서주 무왕)은 군대를 모아 상나라에 반역하려 했다.
희발의 부하 강태공은 뜻을 같이하는 제후들을 모아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이때 백이와 숙제는 무왕을 찾아와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아직 장사도 지내지 않았는데 전쟁을 할 수는 없다.
그것은 효가 아니기 때문이다.
주나라는 상나라의 신하 국가이다.
어찌 신하가 임금을 주살하려는 것을 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
이에 희발은 크게 노하여 백이와 숙제를 죽이려 했으나,
강태공이 이들은 의로운 사람들이라 하여 죽음을 면했다.
이후 희발은 상나라를 토벌하고 주나라의 무왕이 되었다.
백이와 숙제는 상나라가 망한 뒤에도 상나라에 대한 충성을 버릴 수 없으며,
고죽군 영주로 받는 녹봉 역시 받을 수 없다며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었다.
이때 왕미자라는 사람이 수양산에 찾아와 백이와 숙제를 탓하며,
“ 그대들은 주나라의 녹을 받을 수 없다더니
주나라의 산에서 주나라의 고사리를 먹는 일은 어찌된 일인가. ” 하며 책망하였다.
이에 두 사람은 고사리마저 먹지 않았고, 마침내 굶어 죽게 된다.
이후,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는 끝까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충절을 지킨 의인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되어,
중국 문화권의 문헌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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