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인존무상

3:37 공우 천사를 따른 뒤로 여러 제자들이 모두 보발하였으므로

삭발한 자신이 한물에 싸이지 못함을 불안하게 생각하여

머리를 길러 수삭후에 솔잎 상투에 갓 망건을 쓰고 다니더니

하루는 금구를 지나다가 전일 일진회 동지 십여인을 만남에

일진회원들이 공우의 장발하였음을 조소하며 붙들고 늑삭하여 버린지라

공우 집에 돌아와서 두어달 동안 출입을 폐하고 다시 머리를 기르더니

뜻밖에 천사께서 이르사 공우에게 수삭동안 나오지 아니한 이유를 물으시거늘

공우 황공하여 일진회원들에게 늑삭 당한 경과를 아뢰고

다시 삭발한 모습으로 선생을 뵈옵기가 황송하므로

집에 있으면서 머리를 다시 길러 관건을 차린 뒤에

선생께 뵈이려 한다는 뜻을 아뢰니

천사 가라사대 나는 오직 마음을 볼 뿐이니

머리에 무슨 관계가 있으리요 하시고 공우를 데리고 구릿골로 오시니라.

 

해석: 사람을 평가하는데 있어 외모가 아닌 마음을 기준으로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일진회[ 一進會 ]

대한제국 말기에 친일에 앞장선 단체.

1904년 8월 송병준과 독립협회 출신 윤시병, 유학주, 이용구 등이 조직했다.

당초 8월 18일 한성부에서 송병준이 일본군을 배경으로

'유신회'를 조직하였다가 8월 20일에 다시 '일진회'로 회명을 개칭했으며

같은 해 9월에 조직한 이용구의 진보회를 매수·흡수하여 일진회에 통합하였다.

이후 회장 이용구와 송병준 주도 하에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탄될 때까지

일제의 군부나 통감부의 배후조종 하에 침략과 병탄의 앞잡이 행각을 벌였다.

일진회의 결성은 일본이 고문정치로

한국정부를 간섭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민간 차원의 친일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일본은 이를 위해 러일전쟁 때 일본군의 통역이던 송병준 등을 내세웠다.

일진회 결성에 대해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칙령으로 경무사 신태휴로 하여금 이를 해산토록 명령했으나,

일본 헌병들이 이를 막았고 오히려 그들의 회합을 옹호하였다.

일진회는 강령으로 왕실의 존중, 인민의 생명 및 재산 보호,

시정(施政)의 개선, 군정(軍政) ·재정(財政)의 정리 등 4대 강령을 내세우고

국정의 개혁을 요구해 겉으로는 친일단체임을 밝히지 않았으나

금세 친일 색채를 드러냈다.

일진회의 활동은 초기에는 한성부를 무대로 하였을 뿐

대중적 기반을 갖지 못하고 일제의 보호 하에 겨우 명맥만을 유지했다.

이 무렵 이용구 등이 동학의 잔여세력을 규합하여

이해 9월 하순에 조직한 진보회가 전국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음에 주목해

송병준은 두 단체의 합동을 추진, 일진회에 통합하였다.

이후 지방조직을 갖춰 13도총회장에

이용구, 평의원장에 송병준이 각각 취임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 체결을 10여 일 앞두고는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위임함으로써

국가 독립을 유지할 수 있고 복을 누릴 수 있다’는 내용의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1907년 5월 2일에는

국채보상운동으로 야기된 모든 사태가 한국 정부의 잘못이라고 공격하기도 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안중근 의사에 의해 저격 당한 뒤부터

일진회의 매국행위는 더욱 노골화돼

국권피탈안을 순종 황제에게 몇 번씩 올리기도 했다.

1909년 12월 4일에는 100만 일진회 회원의 이름으로

대한제국 순종과 내각, 통감부에 〈일한합방상주문〉을 제출하고,

대한제국 2000만 동포 앞으로는 일한합방 촉구 성명서를 발표했다.

일진회원들은 부일행위의 반대급부로 관찰사 등 공직에 임용되기도 했는데,

특히 송병준은 이완용 내각에서 농상공부대신(뒤에 내부대신에 승진)에까지 올랐다.

일진회는 1910년 8월 22일 합병조약이 체결된 후

9월 26일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끝내고 해체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일진회 [一進會]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 종합)

3:38 하루는 형렬에게 옛글을 외워주시며 잘 지키라 하시니 이러하니라

夫用兵之要 在崇禮而重祿 禮崇則義士至 祿重則志士輕死

故 祿賢不愛財 賞㓛不逾時 則士卒兵 敵國削

부용병지요 재숭례이중록 예숭즉의사지 녹중즉지사경사

고 녹현불애재 상공불유시 즉사졸병 적국삭

해석: 강태공이 저술하였다고 전해지는 육도삼략의 삼략중 상략에 나오는 내용이다.

원래 증산님께서 형렬에게 말씀하시지 않은 내용이라고 한다.

형렬이 자신을 높이기 위해 자작 삽입하였을 것으로 의심이 드는 구절이다.

3:39 또 형렬에게 옛글을 외워주시며 잘 기억하라 하시니 이러하니라

處世柔爲貴 剛强是禍基 發言常欲訥 臨事當如痴

地常思緩 安時不忘危 一生從此計 眞個好男兒

처세유위귀 강강시화기 발언상욕눌 임사당여치

급지상사완 안시불망위 일생종차계 진개호남아

해석: 중국 진시황 시대에 무명씨가 지은 것으로 전해 내려온다.

이 역시 말씀하시지 않은 내용으로 자작삽입의 의심이 드는 구절이다.

3:40 또 형렬에게 옛글을 외워주시니 이러하니라

明月千江心共照 長風八隅気同驅

명월천강심공조 장풍팔우기동구

또 가라사대 너는 좌불이 되어 처소를 잘 지키라

나는 유불이 되리라 하시니라.

해석: 우암 송시열 선생의 자경시의 일부로 알려져있다.

이 역시 원래 없던 내용으로 자작삽입의 의심이 드는 구절이다.

3:41 종도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시속에 남조선사람이라 이르나니

이는 남은 조선사람이란 말이라

동서 각 교파에 빼앗기고 남은 못난 사람에게 길운이 있음을 이르는 말이니

그들을 잘 가르치라 하시니라.

 

해석

남조선: 간혹 남한만을 지칭한 것으로 오해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북한 사람까지 포함해서 하신 말씀이다.

증산님의 말씀 그대로 남은 조선 사람이다.

3:42 하루는 형렬을 명하사 종이에 육십사괘를 점치고

이십사방위자를 둘러 쓰이사 태양을 향하여 불사르시며 가라사대

여아동거하자 하시고 형렬을 돌아보시며

가라사대 잘 믿는 자에게 해인을 전하여 주리라 하시니라.

 

해석: 이 역시 형렬에게 말씀하지 않은 내용이라 한다.

 

[출처] 대순전경 3:37~3:42 일진회 두마음 남조선사람|작성자 서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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