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극대도
2021. 5. 24. 12:16
2021. 5. 24. 12:16
작성자: 인존무상
3:43 또 가라사대 선배는 반드시 몸에 지필묵을 가져야 하느니라.
해석
선배: 선비로 고쳐야 한다.
스스로 노력해서 배우고 덕을 닦으라는 말씀이다.
증산님께선 항상 몸에 지필묵을 니니고 다니셨다 한다.
3:44 또 형렬에게 일러 가라사대
선비는 대학경일장장하를 알아두어야 하느니라 하시고 외워주시니 이러하니라.
右經一章 盖孔子之言而曾子述之 其餘十章則 曾子之意而門人記之也
舊傳頗有錯簡 今因程子所定而更考經文 別有序次如左
우경일장 개공자지언이증자술지 기여십장즉 증자지의이문인기지야
구전파유착간 금인정자소정이갱고경문 별유서차여좌
해석: 이 역시 원래 없던 형렬에게 하시지 않은 말씀이라고 한다.
참고로 해석해보면 '오른쪽 일장은 대범 공자의 말을 증자가 기술하였고
나머지 십장은 증자의 뜻을 문인이 기록한 것인데,
옛날의 경전은 글이 간단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부분이 있으므로
이제 정자의 정한 바에 따라
새롭게 글 뜻을 궁구하여 다르게 차서를 나누니 왼쪽과 같다'이다.
3:45 또 형렬에게 옛 글을 외워주시며 잘 기억하라 하시니 이러하니라.
如有一介臣斷斷兮 無他技 其心休休焉 其如有容 人之有技 若己有之
人之彦聖 其心好之 不啻如自其口出 是能容之 以保我子孫黎民
尙亦職有利哉 人之有技 冒疾而惡之
人之彦聖 而違之俾不達 是不能容 以不能保我子孫黎民 亦曰殆哉
해석: 이 역시 원래 없던 내용이라 한다.
대학 10장 치국평천하의 진서 서경 주서 가운데 1편 마지막 내용이다.
자세한 해석은 생략한다.
3:46 또 형렬에게 일러 가라사대
모든 말을 묻는 자가 있거든 듣고 실행이야 하든지 아니 하든지
너는 바른대로만 일러주라 하시니라.
해석: 형렬은 증산님의 말씀을 듣고
이를 남에게 잘 전해주지 않았다 한다.
이를 미리 아시고 경계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3:47 하루는 종도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세상에 성으로 풍가가 먼저 났었으나 전하여 오지 못하고
사람의 몸에 들어 다만 체상의 칭호로만 쓰게 되어
풍신 풍채 풍골등으로 일컫게 될 뿐이요
그 다음에 강가가 났었나니 강가가 곧 성의 원시라
그러므로 이제 개벽시대를 당하여 원시로 반본되는 고로
강가가 일을 맡게 되었느니라.
해석
풍가: 태호복희씨가 풍씨 원조이다. 15대만에 절손되었다 한다.
체상: 體相, 다른 뜻으로 으뜸이란 뜻도 있다고 한다.
3:48 부친으로 하여금 일상생활에 매양 자력을 쓰도록 하시고
평소에 허물 지은 것을 생각하여 허물 닦기를 힘쓰시라 하사
종도들 중에 혹 물품이나 금품을 드리는 것을 엄금하시더니
어떤 종도가 집이 너무 협착함을 민망히 여겨
그보다 큰 집을 사드린 자가 있거늘 천사 꾸짖어 가라사대
네가 어찌 나의 부친을 도적을 만들려 하느냐 하시고
다시 일러 가라사대 속 모르는 사람은 나에게 불효라 할지 모르나
나는 부친의 앞 길을 닦아 드리려 함이로다.
내가 항상 가늠을 놓고 보는데 만일 그 가늠에 어그러지면 허사가 되나니
너희들이 부친의 빈궁하심을 민망히 여겨 원조하여 드리고 싶거든
먼저 나에게 말하면 그 가늠을 변경하리라 하시니라.
해석
부친: 증산님의 부친은 전생이 중국 삼국시대의 오나라 장수 여몽이다.
증산님께서 박공우에게 당신님의 부친을 잘 섬기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이는 전생의 원한을 풀기 위한 배려의 말씀이었다.
박공우의 전생이 관우이다.
어떤 종도: 차경석이다.
여몽[ 呂蒙 ]
요약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장수로 노숙의 뒤를 이어 대도독의 지위에 올랐다.
자(字)는 자명(子明)이고 호위장군(虎威將軍)을 지내 여호위(呂虎威)라고도 불린다.
주유(周瑜)와 노숙(魯肅)의 뒤를 이어
오(吳) 나라의 군사 책임자인 대도독(大都督)이 되었으며 잔릉후(孱陵侯)로 봉해졌다.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오서(吳書)’에 그의 전기(傳記)가 전해진다.
여몽(呂蒙)은 오늘날의 안후이성[安徽省] 푸난[阜南] 지역인
여남군(汝南郡) 부피현(富陂縣) 출신으로
집안이 가난하여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어려서 매부인 등당(鄧當)이 있는 강동(江東)으로 건너갔으며,
손책(孫策)의 부하였던 등당이 산월(山越) 토벌에 나섰을 때
10대의 나이로 함께 출정하였다.
그러다 손책에게 발탁되어 등당이 죽은 뒤에
그의 직무를 계승하여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임명되었다.
200년 손책이 죽은 뒤에는 그의 아우인 손권(孫權)을 보좌하였으며,
204년 손권이 강하태수(江夏太守) 황조(黃祖) 정벌에 나섰을 때 공을 세워
평북도위(平北都尉)로 임명되었다.
208년 손권이 다시 하구(夏口, 지금의 湖北省 武漢)로 진공하였을 때
황조의 수군을 격파하여 횡야중랑장(橫野中郎將)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해 적벽(赤壁) 전투에서 주유(周瑜), 정보(程普) 등과 함께
조조(曹操)의 군대를 물리쳤고,
강릉(江陵)을 지키던 조인(曹仁)과의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그래서 오나라가 강릉을 점령해 양쯔강 중류 지역을 차지한 뒤에
편장군(偏將軍)과 심양령(尋陽令)으로 임명되었다.
213년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유수구(濡須口, 지금의 安徽省 無為)로
진공해왔을 때에는 조조의 군대를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워
여강태수(廬江太守)의 직책을 맡게 되었다.
214년 촉(蜀)나라가 형주(荊州)의 장사(長沙)・계양(桂陽)・
영릉(零陵)의 3개 군(郡)을 돌려달라는 요구를 거절하자
여몽은 형주 공략에 나섰다.
그는 오나라가 장사・계양 2개 군을 영토로 편입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215년에는 합비(合肥)를 공격하다가
장료(張遼)의 기습을 받아 위기에 빠진 손권을 구했고,
217년에는 도독(都督)이 되어 오나라를 쳐들어온 조조의 대군을 물리쳤다.
그 공으로 여몽은 좌호군(左護軍) 호위장군(虎威將軍)으로 임명되었으며,
노숙의 뒤를 이어 오나라의 대도독(大都督)이 되었다.
219년 촉나라의 관우(關羽)가 위나라의 조인(曹仁)이 지키던
번성(樊城) 공략에 나서자 여몽은 그 틈을 타서
관우의 배후를 공격해 형주를 점령하고 관우를 사로잡아 처형하였다.
그 공으로 여몽은 남군태수(南郡太守)로 임명되었으며, 잔릉후(孱陵侯)로 봉해졌다.
당시 여몽은 병으로 몸이 허약해진 상태라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고 싶다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손권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손권은 각지의 명의들을 불러들여 여몽의 병을 치료하게 했다.
이후 여몽의 병은 일시 호전되는 듯했으나 다시 악화되어 결국 사망했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는
관우의 귀신이 여몽의 목숨을 빼앗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여몽은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를 죽였다는 이유로
그다지 좋게 묘사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진수는 ≪삼국지(三國志)≫에서 여몽을 용감할 뿐 아니라
지략도 뛰어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여몽과 관련해서는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고사성어도 전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여몽 [呂蒙] (두산백과)
3:49 매양 옛 사람을 평론하실때
강태공 석가모니 관운장 이마두를 칭찬하시니라.
해석: 관운장은 불가피하게 살생을 하게 될 때에
선택적으로 이를 행한 공덕이 있고,
강태공은 제잔금폭의 묘략을 후대에 전수한 공덕이 있고,
이마두는 증산님에게 인류의 큰 겁액을 하소연하여
지상으로 강세하시게 만든 공덕이 있다.
석가모니에 대해서는 칭찬도 하셨으나
부모의 윤기와 음양을 끊게 만든다 하여 꾸짖으신 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