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인존무상
3:57 하루는 종도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김병욱이 남의 나라 일만 힘쓰니 그 식록을 떼리라 하시더니
그 뒤에 공우 전주에 가서 병욱을 찾으니
생도가 궁핍하여 가구를 전당하여 경과하거늘 돌아와서 아뢰니
천사 웃으시고 글을 써서 불사르시더니
그 뒤에 다시 전주에 가서 병욱을 만나니 생계가 다시 넉넉하여졌더라.
해석
김병욱: 인간으로 처음 생을 받아나온 인물이다.
남의 나라 일: 병욱이 알게 모르게 일본 또는 친일파 세력과 관련하여
그 앞잡이 역활을 한 적이 있음을 말하신 것이다.
가구를 전당: 주변 사람들의 인심을 잃고 궁핍하게 사는 생활상을 드러내고 있다.
웃으시고: 공우가 전주에 병욱을 찾아 간 것은 술을 얻어먹기 위한 것이었다.
증산님께서 그 정황을 아시고 웃으신 것이다.
3:58 하루는 종도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대인의 도를 닦으려는 자는
먼저 아내의 뜻을 돌려 모든 일에 순종케 하여야 하나니
아무리 하여도 그 마음을 돌리지 못할 때에는
더욱 굽혀 예를 갖추어 경배하여 날마다 일과로 하면
마침내 순종하게 되나니 이것이 옛 사람의 법이니라.
해석
대인: 증산님 자신을 일컫는 말이다.
전체적으로는 후천 중생들의 남녀관계,생활상을 말씀하신 것이다.
3:59 또 가라사대 자고로 부인을 존신하는 일이 적었으나
이 뒤로는 부인도 각기 닦은 바를 따라 공덕이 서고
신앙이 모여 금패와 금상으로 존신의 표를 세우리라.
해석: 앞으로 후천시대가 되면
정음정양의 남녀관계가 정립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공덕이 서고 신앙이 모인다는 것은
부인의 노력과 정성이 흩어지지 아니하고
일정한 결과물로 드러나 남자 못지않게 인정받게 됨을 말함이다.
3:60 공우 천사를 모시고 태인읍을 지날 때
한 젊은 여자가 지나거늘 공우 체면상 바로 보지는 못하였으나
그 아름다운 태도를 사모하여 잊지 못하더니
천사 아시고 일러 가라사대 색은 남자의 정기를 모손케 하는 것이니
이 뒤로는 여자를 만나볼 때에 익히 보고 마음에 두지 말라 하시거늘
공우 깨닫고 그 뒤로는 여자를 대할 때에 매양 명하신 대로 하니
마음에 탐욕이 일어나지 않더라.
해석
젊은 여자: 이 때의 일로 공우가 상사병을 얻어 일주일동안 고생하였다.
젊은 여자는 전생이 곽성통(후한 광무제 유수의 제1황후)이라 한다.
눈이 약간 사팔이었고, 이 당시에 행실이 바르지 못하고
공우에게 먼저 추파를 던졌다 한다.
3:61 이 뒤에 공우 다시 천사를 모시고 태인읍을 지날 때
두 노파가 지나거늘 천사 길을 비켜 외면하고
서서 다 지나가기를 기다려 길을 가시며 가라사대
이제는 해원시대라 남녀의 분별을 틔워 각기
하고 싶은대로 하도록 풀어 놓았으나
이 뒤에는 건곤의 위차를 바로잡아 예법을 다시 세우리라 하시니라.
해석
두 노파: 두 노파의 전생은 진시황제때 후궁들이었다.
서로 앙숙지간이어서 나중에는 상대편의 자식까지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제는 해원시대: 이때부터 현재까지 계속되는 상황이다.
이 뒤로는: 후천에 이루어질 상황을 말씀하신 것이다.
건곤의 위차: 선천의 남존여비 상황이 바뀌어
남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관계가 성립되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법: 형식보다는 마음이 중요하게 예법이 바뀔 것이다.
3:62 공우가 천사를 모시고 태인 감곡면 산직촌 앞을 지나실 새
물어 가라사대 복을 얼마나 지니면 쓰겠느냐 대하여
가로대 많이 지녀야 하겠나이다 어디다 쓰겠느냐
대하여 가로대 빈핍하여 의식이 없는 사람을 먹이고 입혀야 하겠나이다
가라사대 복이 너무 많으면 귀치 않으니 웬만큼 지녀야 하느니라 하시니라.
해석: 증산님께서 후천사람들의 이야기를 하신 것이데
공우가 자신에게 복을 주신다는 의미로 착각하여 대답한 내용이다.
3:63 하루는 천원에 계실 때 참외를 드린 자가 있거늘
천사 맛보지 않고 두셨더니
공우 한개를 먹음에 설사가 나서 낫지 아니한지라
천사께 아뢰니 가라사대
본래 그 아내가 주기 싫어하였으므로 살기가 붙어있었느니
네가 그 살기를 맞았도다 하시고
닭국을 먹으라 하시거늘 공우 명하신 대로 함에 곧 나으니라.
해석
천원: 천원이 아니고 강원도 철원이다.
참외 드린 자: 참외를 드린 자는 전생이 후한시대 발해 효왕이다.
그 부인은 전생이 효왕의 어머니인데 심성이 모질고 독종이라 전한다.
3:64 하루는 부안 사람이 감주를 드리니 천사 물리쳐 가라사대
이것은 곧 구천하감주거늘 네가 어찌 도적음식을 들이느냐 하시거늘
종도들이 그 사람에게 물으니 가로대
아내가 듣지 아니하므로 가만히 가져왔노라 하더라.
해석: 없었던 일이라 한다.
3:65 구릿골에 계실 때 꿩 한 마리를 드리는 자가 있거늘
천사 받아두사 사흘을 지내니 꿩이 썩게 된지라
종도들이 아뢰니 종도들로 하여금 삶아 먹게 하시고
조금도 맛보지 아니하시거를
그 연고를 물은 대 가라사대 그 아내가 싫어하였으므로
그 꿩에 살이 박혀있느니라
다시 물어 가로대 그러면
어찌 우리들로 하여금 살 박힌 것을 먹게 하였나이까
가라사대 이제 그 살은 다 제하였노라 하시니라.
해석
꿩 드린 자: 전생이 서진시대 무제의 아들 혜제이다.
그 부인의 전생은 혜제의 부인 가남풍이라 한다.
혜제[ 惠帝 ]
요약 중국 삼국시대 서진(西晉)의 제2대 황제.
이름은 사마충(司馬衷), 자는 정도(正度)이다.
중국 삼국시대 서진(西晉)을 건국한 사마염(司馬炎)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장남이지만 본디 능력이 떨어지고 학문에 뜻이 없어
사마염의 동생이자 사마충의 숙부인 제왕(齊王) 사마유(司馬攸)가
대신 제위를 이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다.
그러나 290년 사마염이 죽자 제2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사마충은 황제에 등극했으나,
황제로서의 능력을 갖추지 못해 국정 운영을 장악하지 못하였다.
가충(賈充)의 딸 가남풍(賈南風)이 황후로서
외척의 힘이 거대해지고 팔왕의 난까지 벌어져
서진(西晉)은 통일한 지 반세기도 되지 않은 기간에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가남풍[ 賈南風 ]
진(晉)나라 평양(平陽) 양릉(襄陵) 사람. 혜제(惠帝)의 황후로,
가규(賈逵)의 손녀고 가충(賈充)의 딸이다.
무제(武帝) 태시(泰始) 8년(272) 태자비로 책봉되고,
혜제가 즉위하자 황후가 되었다.
태후(太后)의 아버지 양준(楊駿)이 정치를 보좌했다.
영평(永平) 원년(291) 초왕(楚王) 사마위(司馬瑋)를 시켜 양준을 살해하고
여남왕(汝南王) 사마량(司馬亮)으로 태재(太宰)를 삼았다.
조서(詔書)를 고쳐 사마위로 하여금 사마량을 죽이게 하고,
얼마 뒤 사마위도 살해했다.
황음(荒淫) 방자했고, 투기가 심한데다 음탕했다고 한다.
10년 동안 권력을 휘둘렀는데,
민회태자(愍懷太子) 사마휼(司馬遹)을 죽여 민심이 등을 돌리게 되었다.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에게 살해당했다.
빈계(牝鷄)의 화(禍), 즉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식으로
중국사에서 가혹하게 평가되어 왔지만,
진나라 황실을 수호하려던 여걸(女傑)로 평가되기도 한다.
3:66 구릿골 약방에 계실 새 양지에 글을 쓰시더니
전간제의 문도 오륙인이 대립을 쓰고 행의를 입고 와서
선생님 뵈옵겠습지다 하며 절을 하거늘 천사 돌아 보시며 가라사대
나는 너의 선생이 아니로다 하시며 절을 받지 아니하시니
그 사람들이 우두커니 섰다가 물러가니라.
해석
전간제의 문도 오륙인:
전간제를 포함하여 8인으로 고쳐야 한다.
이들의 전생은 서진시대 8왕이었다.
8왕의 난
황실과 세족은 통치력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봉건제를 회복하였다.
무제는 자신이 위를 손쉽게 찬탈할 수 있었던 것이
조씨 종실의 힘이 약했기 때문이라 보고 황족 27명을 왕으로 봉했다.
그 후에 숫자는 더욱 늘어났으며,
왕 이외에 성이 다른 공후국이 500여 개나 되었다.
그리고 왕국은 물론 공후국도 군대를 갖고 각지에 나가 있어
지방의 군사 정치 대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국가는 사분오열되고 왕국끼리 서로 다투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편, 무제 다음으로 어린 혜제(惠帝)가 즉위하여
외조부 양준(楊駿)이 정치를 보좌하였다.
그런데 가 황후(賈皇后)가 정권을 빼앗기 위하여
원강(元康) 원년(291)에 형주의 초왕(楚王) 위(瑋)를 서울로 불러들여
양준을 죽여 8왕의 난이 시작되었다.
가후가 양준을 죽인 다음에 여남왕(汝南王) 양(亮)과
원로인 위관(衛瓘)이 정치를 보좌하게 되어,
가후는 다시 초왕을 불러들여 양과 위관을 죽이도록 하고,
다시 전권을 행사한다는 죄명으로 초왕도 죽였다.
가후는 권력을 장악하고 난 다음에 태자를 폐하고
양 태후를 죽이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가후의 전정은 여러 왕의 불만을 가져왔고
모두가 가후의 통치권을 빼앗으려고 하였다.
영강(永康) 원년(300)에 조왕(趙王) 윤(倫)이 기병하여
가후와 그 일당을 죽이고, 혜제를 태상황으로 삼은 다음
자신이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이에 대하여 여러 왕이 불복하여
제왕 경(冏), 성도왕 영(穎), 하간왕 우(顒), 장사왕 예(乂)가 군대를 일으켜
조왕을 반대하였다. 결국 조왕은 패하여 살해되고,
다시 성도왕과 장사왕이 제왕을 죽이고,
성도왕과 하간왕이 합하여 장사왕을 죽이더니,
마지막으로 동해왕 월(越)이 성도왕과 하간왕을 평정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혜제를 독살하고 혜제의 동생을 황제로 세워 회제(懷帝)가 즉위하였다.
이로써 16년(291~306) 동안 계속된 8왕의 난이 끝났다.
이처럼 황실의 골육상잔은 중원 일대의 재앙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를 파괴하여 국가의 기본을 흔들어 놓았다.
또, 8왕의 난은 주로 낙양 일대에서 일어났는데,
한번에 동원된 사람이 30만 명, 사상자가 10만 명에 달하였다.
낙양 주변에 있는 13세 이상의 남자는 거의 군대나 부역에 동원되었고,
쌀값이 1석에 1만 전이나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혼란이 16년이나 계속 되었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혼란은 이 시기에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려는
호족(胡族)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
회제 영흥(永興) 원년(304)에 성도왕 영은 동해왕 월에 대항하기 위하여
흉노인 유연(劉淵)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유연이 좌국성(左國城, 산서 이석현 동북)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자칭 한왕(漢王)이라 하여, 진은 오호난화(五胡亂華)의 화를 자초한 셈이 되었다.
3:67 하루는 공우를 데리고 태인 보림면 장자동을 지나실 새
길가에 있는 박씨 묘를 보시고 가라사대
이 혈이 와우형인데 금혈형이라고 혈명을 잘못 지어서 발음이 잘 못 되었느니라
어디든지 혈명을 모르거든
용미없이 조분하였다가 명사에게 혈명을 지은 뒤에
용미를 달면 발음이 되느니라 하시니라.
해석
혈: 지기가 모이는 곳을 이른다.
臥牛形: 臥宇形으로 고쳐야 한다.
겉으로 보기에 묘인지 분간되지 않으나 남이 이미 쓴 묘를 일컫는다.
琴穴形: 禁穴形으로 고쳐야 한다. 써서는 않되는 자리를 일컫는다.
3:68 하루는 공우에게 태인 살포정 뒤에 호승예불을 써주리니
역군을 먹일 만큼 술을 많이 빚어 넣으라 하시므로 공우 명하신대로 하였더니
그 뒤에 천사 장사 지내주리라 하시며
종도들과 함께 잡수시고 글을 써서 불사르시니라
또 가라사대 지금은 천지에 수기가 돌지 아니하여
묘를 써도 발음이 되지 않느니라
이 뒤에 수기가 돌 때에는 와지끈 소리가 나리니
그 뒤에라야 땅 기운이 발하리라.
해석
호승예불:
그냥 호승예불이 아니라 관운장,진묵 호승예불로 고쳐야 한다.
역군을 먹일 만큼:
박공우와 진묵대사는 그 공통점이 술을 좋아햇슴을 지적하신 것이다.
박공우의 전생이 관운장이었다.
수기가 돌지 아니하여:
전전장인 3:67장과 관련된 내용이다. 참고로 수기가 돈다는 것은
신명들이 자기 자리를 잘 찾아간다는 의미가 있다.
장사 지내주리라:
억울한 죽음을 당한 진묵과 관운장을 해원시켜 주신다는 의미이다.
[출처] 대순전경 3:57~3:68 김병욱 건곤의위차 살기 전간제 혈명 호승예불|작성자 서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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